교황 우르바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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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바노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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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우르바노 2세(라틴어: Urban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Urbano II)는 제159대 로마 교황(재위: 1088년 3월 12일 - 1099년 7월 29일)이다. 속명은 오도 드 라제리(프랑스어: Odon de Lagery)이다.
[편집] 생애
1042년 프랑스 상파뉴의 샤리용쉬르마른에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랭스에서 성 브루노의 문하생이 되어 1064년 수사가 되어 클뤼니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 후 로마로 파견되어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개혁운동을 도왔고, 1078년에는 오스티아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084년 신성로마제국에 교황청 사절로 파견되어 퀘들린부르크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대립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을 단죄하였다. 1088년 3월 12일 교황 빅토르 3세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프랑스인으로는 두 번째 교황이다.
우르바노 2세는 교황좌에 오르자 그레고리오 7세 시대에 일어난 문제들과 전임자 빅토르 3세에 의해 악화된 문제들을 이어받았다. 그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지만 재위 초기에는 당시의 여러 가지 정치적 문제들이 산적해 있어 신중한 타협책으로 차근차근 개혁을 조심스럽게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막상 교황의 위치가 견고해지자 태도를 바꾸어 강경하게 개혁정책을 시행해 나갔다.
우르바노 2세는 그레고리오 7세처럼 에스파냐의 영토를 재정복하여 아라곤과 카탈루냐 지방 등을 교황령에 귀속시키려고 하였다. 교황청이 신성로마제국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시칠리아의 힘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098년 7월 5일 시칠리아 영토를 교황청에 헌납한 대공 로제리오 1세에게 준교황청 사절의 권한을 부여하고 칙서로써 이를 분명히 하였다. 우르바노 2세는 하인리히 4세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동맹을 맺을 것을 우려하여 시칠리아와 관계를 정상화시킨 다음 비잔티움 제국과도 협상을 시도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유화적인 서신을 접하게 되어 이를 계기로 우르바노 2세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비잔티움 제국과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1089년 그는 멜피에서 주교회의를 소집하여 평신도 성직 수여와 성직매매 및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또한 1095년에는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재차 주교회의를 소집하여 1089년때의 칙서를 더 강화하는 한편, 앞으로는 기독교도끼리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을 교회법으로 선포하였고, 본처를 두고 베르트라다와 결혼한 프랑스 왕 필리프 1세를 크게 꾸짖으며 단죄하였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는 성지 탈환과 분열된 동방 정교회와의 재일치를 주장하며 십자군 운동을 일으켰다. 우르바노 2세는 자신의 대리자로서 아데마르 주교를 십자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지휘토록 하였다. 그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2주일 전에 선종하였다.
우르바노 2세는 그레고리오 7세를 뒤따라가는 발에 불과하였으나 인격과 교육 면에서는 다른 점이 많았다. 그는 학식 있는 법률가였으므로 일을 처리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유연하고 정치적이었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의 재능과 동기를 평가하는 예외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삶은 파란만장의 연속이었고, 그의 복자 시복식은 사후 800년이 지나 1881년 7월 14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거행되었다.
전 임 빅토르 3세 |
제159대 교황 1088년 3월 12일 - 1099년 7월 29일 |
후 임 파스칼 2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