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가와 요시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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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가와 요시모토
- (1519년 ~ 1560년 6월12일)
-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전국시대의 무장 전국다이묘로 다케다 신겐의 매부이다.
- 스루가국의 슈고다미묘로 있는 이마가와씨의 제9대 도슈.
- 제7대 도슈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정실로 있는 쥬케니의 아들로 아명은 호기쿠마루.
- 정실은 다케다 노부토라의 딸로 다케다 신겐의 누이인 죠케인.
- 아들은 이마가와 우지자네, 딸은 다케다 요시노부의 부인인 레쇼인.
- 가이도이치노 유미토리(도카이도 제일의 궁사)라고 불리며, 자국령경영과 정벌에 재능을 발휘 이마가와씨를 전국다이묘 반열에 올려놓았다. 소령으로는 스루가, 도오토우미, 미카와, 오와리 일부까지 확대하고 [천하에 가장 가까운 남자]라고 불리었지만, 오와리 침공시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열세의 오다 노부나가군에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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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내란과 가독상속
이마가와가 제7대 도슈로 있는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이미 친형인 이마가와 우지테루(제8대 도슈)가 있었기 때문에 4살 때 불문에 입적되어 린자이슈(임제종)의 젠토쿠지에 맡겨진다. 이때 법명은 바이가쿠쇼호이다. 이마가와 일족출신의 승려 다이겐 셋사이와 함께 교토로 상경해 고잔(지카쿠: 수행방법, 법도등)을 배운다.
1536년 우지테루가 급사했기 때문에 스루가로 돌아간다. 이때 출가 했던 이복형 겐코에탄과 가독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셋사이의 조력으로 승리하게 된다. 이것을 하나쿠라노란이라 부른다. 아무튼, 가독을 승계하고 제9대 스루가슈고에 오른다. 이때 이름을 요시모토로 개명한다.
[편집] 호죠, 오다와의 싸움
1537년 이마가와 우지테루(요시모토의 형)때까지 숙적으로 있는 다케다 노부토라의 딸과 결혼을 하고, 가이의 다케다씨와 동맹을 맺는다. 그런 까닭에 오래전부터 연이 깊었던 호죠씨와의 동맹이 결렬되고, 호죠 우지쓰나가 스루가 가토군요시하라(현 시즈오카현 후지시)로 침공해 온다. 요시모토는 그것에 대해 교전했지만, 우지쓰나에게 패해 가토군을 빼앗긴다.
더욱이 오와리의 오다 노부히데가 1540년부터 미카와에 대해 침공을 개시한다. 이에 요시모토는 미카와의 호족들과 연합하여 1542년 노부히데와 일대 결전을 벌리지만, 노부히데의 맹공 앞에 패하고 만다. (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
[편집] 세력확대
호죠가에서는 1541년 우지쓰나가 죽고 호죠 우지야스가 가독을 계승하지만,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우지야스와 적대적인 우에스기 나리마사와 1545년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연합해서 우지야스를 공격한다. 그 결과 요시모토와 우지야스는 다케다 하루노부(다케다 신겐)의 중개로 화친하게 되고, 화친의 조건은 호죠가에게 빼앗겼던 가토군의 반환이었다. 그리고, 1551년 우지야스에 의해 고우코쿠지성을 빼앗겼지만, 곧 탈환하고 기세가와를 국경으로 했다.
미카와에 있어서도, 오와리의 오다 노부히데의 진출에 따른 앞박을 받고 있던 니시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의 귀순을 받아들여,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의 적자 다케치요(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인질로 받아 들이지만, 호송도중 미카와 다하라성의 영주 도다 야스미쓰의 배신으로 호송중 다케치요를 적국인 오다가로 보내버린다. 이것은 전년에 도다가의 일족으로 있는 도다 (노부나리?후사시게?), 도다 (요시미쓰?)를 멸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에 원한을 품은 도다 종가(宗家)의 도슈로 있던 야스미쓰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에 격노한 도다 소우케를 멸문시키고, 그의 거성이었던 다하라성을 아사히나씨에게 넘긴다.
1548년 요시모토의 미카와진출에 위기감을 느낀 오다 노부히데가 미카와를 침공해 오지만 요시모토의 중신으로 있는 다이겐 셋사이, 아사히나 야스요시를 대장으로 해서 오다군에 대승하고, 오다가의 세력을 사실상 미카와로부터 몰아냈다. (제2차 아즈키자카 전투)
1549년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가신에 의해 암살되자, 요시모토는 이마가와군을 오카자키성에 보내 사실상 마쓰다이라가의 소령을 직접지배하에 둔다. 이로서 스루가, 도오토우미, 미카와 3개국을 아우르는 세력을 구축하고 [도카이도 제일의 궁사]등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또, 오다가쪽의 미카와 안쇼성을 공략하고, 오다 노부히데의 서자로 있는 오다 노부히로를 잡아 들이고, 다케치요와 인질교환으로 삼았다. 1551년 노부히데가 죽자, 오다가는 가독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진다. 이를 계기로 오와리 동부의 치타군과 아이치군까지 세력을 뻗친다. 이 즈음에 요시모토의 석고는 90만석에 달한다.
1554년 적자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호죠 우지야스의 딸과 결혼시킨다. 그리고, 다케다가와 호죠가를 중매시켜 사돈관계를 맺게한다. 이렇게 해서 3국동맹을 맺는다. 이것으로 후위에 대한 걱정을 덜게된다.
1558년부터는 우지자네에게 실무경험을 쌓게하고, 자국 영내를 순시한다.
[편집] 말년
1555년 다이겐 셋사이 1557년에는 아사히나 야스요시라는 명보좌간이 차례차례 병사한다. 이에 따라 이마가와가는 쇠퇴기로에 서있게 된다.
1560년 미카와슈에 전임된다. 5월에는 2만2천의 병력을 이끌고 상경을 목표로 오와리로 침공한다. 오다가의 오다카성 주변의 여러 토리데(砦: 작은 성)를 함락하지만, 본대는 오다카성으로 가는 도중 덴가쿠하자마(현 아이치현 도요아케시)에서 휴식중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을 받고 요시모토는 전사한다. (오케하자마 전투 또는 덴가쿠하자마 전투) [신죠코키]에 기술되어 있다. 향년 42세
[편집] 묘소
묘소 : 아이치현 도요아케시 오케하자마코센죠덴세쓰치 무덤 : 아이치현 도요가와시 우시쿠보쵸 (몸 무덤) 아이치현 니시오시 고마바쵸 (머리 무덤)
[편집] 사후
후에 수급은 요시모토의 가신 오카베 모토노부가 개성(오와리 나루미성)을 조건으로 주군 요시모토의 목을 받아 온다. 가독은 적자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승계했지만, 그 보다 미카와에서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립한다. (이에 우지자네는 모토야스의 장인으로 있는 세키구치 치가나가에게 책임을 추궁했기 때문에 자결한다.) 이때부터 이마가와 씨는 쇠퇴의 길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후에 우지자네는 8년후 다케다 신겐에 의해 스루가에서 추방된다. 이로써 이마가와가는 전국다이묘로써 멸망되었다.
[편집] 인물
- 요시모토는 굵은 다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탈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투 때에도 가마를 타고 이동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에도시대 중기에 쓰여진 것이고,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오다 규이치 또는 오다 우시카즈토모가 기록한 신죠코키에서는 오케하자마산에서 퇴각할 때 말을 탓다는 기록이 있고, 요시모토가 가마를 탈 수 있었다는 것은 아시카가 쇼군가로부터 특별히 인정된 영예(이마가와씨는 아시카가씨 일문)이기 때문이다.
- 어릴때부터 불문에 입적했기 때문에 무예를 갈고 닦지 못해서, 무용이 우수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승마를 할 수 없었다는 과장이 생긴 것 같다. 단, 개인의 무용과 전투지휘능력은 별개로 있고, 전국다이묘로서의 요시모토를 평가절하 할 수는 없다.
- 구게(公家: 조정을 섬기는 신분이 높은 사람: 귀족) 문화에 정통하고, 교토에서 축출된 구게들을 보호했다. 그러나. [치아를 검게 칠하고, 오키마유(置眉)와 옅게 화장을 한다.]라는 이야기는 후세에 만들어 졌다는 설도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귀한 가문이라는 의미가 된다. 연약함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여러번에 결친 군사행동이 가신과 영민들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사후 이마가와가가 급속도로 쇠퇴하는 원인중 하나라는 지적도 있다.
- 요시모토는 정치, 군사에 탁월한 전국다미묘였지만, 얄궂게도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한 적장]이라고 더 잘 알려져 있다.
- 1553년 이마가와가나모쿠로쿠(今川仮名目録)인 분국법을 재정하고, 더욱이 상업보호와 유통통제, 요리오야요리코제도(寄親寄子制度: 기인제도)에 따른 가신단의 결속강화를 꾀하는 등, 행정수완으로서 특히 우수했다. 그 후 이정책은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답습된다.
- 1560년의 원정은 쇼락쿠(상경)이 아니라, 오다 노부나가토벌, 오와리공략설도 있다. 당시, 교토에는 미요시 나가요시의한 미요시정권이 절정기로 있었기 때문에, 이마가와가의 병력으로는 무리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