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도전(鄭道傳, 1337년[1] - 1398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이다. 형부사서 정운경의 아들이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독단과 급진적 개혁조치로 다른 개국공신과 왕족들의 반발을 사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편집] 생애
정도전은 충청북도 단양군 삼봉에서 귀족인 아버지와 노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 핏줄로 인해 어린 시절을 온갖 설움을 겪으며 보냈지만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대학자 이색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그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이 바로 정몽주, 이승인, 이존오 등이다.
1360년 문과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 성균박사(成均博士), 태학사(太學士) 등의 중요한 직위를 두루 거치면서 출세를 하였다. 1375년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원나라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권신들의 진노를 사 나주로 유배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377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4년 간 고향에서 지냈다. 그 뒤 북한산 아래에 초가집을 지은 뒤 ‘삼봉재(三峰齎)’라 이름을 짓고 그 곳에서 인재 양성에 힘썼다. 이때 정도전이 즐겨 읽었던 책은 군주도 잘못하면 신하가 벌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맹자(孟子)》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권신들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는 바람에 9년 동안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1383년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동북도지휘사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경도로 직접 찾아가 사귀었다. 이 당시 정도전은 이성계의 무예와 통솔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도 정도전의 학식과 포부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군령이 엄하게 지킬 뿐 아니라 무기들 또한 장 정비되어 있으며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떠보았다. 평생 전쟁터를 누벼 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무슨 일을 말하는 거냐며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였다. 이성계가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정도전은 재빨리 얼버무렸다.
정도전은 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지었다.
- 아득한 세월에 소나무 한 그루
- 몇 만 겹 푸른 산 속에 자랐도다
- 잘 있다가 다른 날에 서로 만나 볼 수 있을는지?
- 인간 세상 굽어보다가 곧 큰 발자취를 남기리니
이 시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는데,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여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을 내쫓고 창왕을 옹립한 다음 최영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잡자 정도전은 힘껏 이성계를 뒤에서 도와주었다. 정도전은 밀직부사에 올라 조준 등과 함께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했다.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바로잡음으로써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차근차근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여주로 유배된 우왕이 자신을 찾아온 김저와 정득후에게 보검을 내려 곽충보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밀명을 내린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렸다. 그리고 정몽주, 조준, 정도전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해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새 왕으로 내세웠다.
그러다 이방원에 의해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이 모두 제거되자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인 조선을 건국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때부터 평소에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 고조와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였는데,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했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 말은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제국을 건설했다는 뜻으로, 자신 또한 태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할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곧 자신이라는 뜻이었다.
조선을 건국하는데 일등 공신이 된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의홍삼군부사(義興三軍府事) 등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을 모두 정도전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가 되었다.
‘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그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즉, 정도전은 임금은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만 머물고 나라의 모든 일은 신하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하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태조 때의 정치는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은 정도전 등 소수의 재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정도전은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 제도의 바탕을 만들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서울을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한 것은 물론, 서울의 도시 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종묘와 사직, 궁궐의 터 등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궁궐 및 각 전각의 이름도 모두 정도전이 손수 지었다. 그 밖에도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도 정도전이 제정한 것이었고, 노비 해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조선의 군사 제도를 만들어내고 직접 군사 훈련을 실시했던 군사 전문가이기도 했다.
왕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정도전은 조선을 신권이 왕권보다 더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차기 임금은 여린 임금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신덕왕후와 손을 잡아 태조의 아들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의안대군을 왕세자로 내세웠다. 이에 태조는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여 의안대군을 왕세자에 책봉했다. 그러나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은 모두들 자신을 제치고 계모 소생의 막내동생이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고,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자신의 의도대로 의안대군을 왕세자에 책봉하는 데 성공한 정도전은 다시 개혁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조선경국전》의 편찬을 주도하여 새로운 법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데 이어 개인 소유의 사병을 혁파하고 과전법을 시행하는 등 기득권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일방적인 정도전의 정책에 대해 점차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1396년 조선은 명나라와 외교적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예전부터 정도전을 경계하였던 홍무제는 그가 쓴 표전문에 명나라를 모독하는 글귀가 있다는 걸 문제삼아 태조에게 정도전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정도전은 병에 걸렸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명나라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무제가 계속해서 그의 소환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점점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위기 의식을 느낀 정도전은 태조의 허락을 얻어 반명 정책을 기지로 요동 정벌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 왕족들과 여러 호족으로부터 몰수한 사병들을 새로 신설한 의홍삼군부에 병합한 뒤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도전의 급진 개혁과 명나라와의 전쟁 준비는 같은 개국공신인 조준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끝내 결별하게 되고 만다.
정도전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날마다 송현에 있는 남은의 별장에 모여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거짓으로 태조의 병이 위독하다고 꾸며 왕자들을 궁궐 안으로 불러들인 뒤, 왕자들이 들어오면 군졸들을 시켜 공격하게 하고 자신들은 밖에서 호응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미 정도전 등의 움직임을 심상치 않게 여기며 예의주시하던 정안대군은 정도전 등의 계획을 알아채고 형제들과 함께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는 사병을 모아 정도전 등이 모여 있는 집을 포위하였다. 정안대군의 사병들이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지르자 깜짝 놀란 정도전 등이 밖으로 뛰쳐나오자 사병들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죽였으며, 정도전은 이웃집으로 피신했으나 그 집 아낙네의 밀고로 붙잡혀 참살당하고 말았다. 그 때 그의 나이 57살이었다.
[편집] 주요 저서
- 《삼봉집(三峰集)》
-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 《경제육전(經濟六典)》
- 《경제문감(經濟文鑑)》
- 《불씨잡변(佛氏雜辨)》
- 《심문천답(心問天答)》
- 《진법서(陣法序)》
참고로 웹에서 그의 저술을 모두 볼 수 있다.(http://blog.empas.com/jbc304/)
![]() |
이 문서는 사람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
![]() |
이 문서는 한국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