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스테파노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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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 4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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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스테파노 4세(라틴어: Stephanus IV, 이탈리아어: Papa Stefano IV)는 제94대 로마 교황(재위: 767년 8월 1일 ~ 772년 1월 24일)이다.
스테파노 4세는 시칠리아 태생으로 올리부스의 아들이며 로마 시내 성 체칠리아 성당의 주임 신부로 있다가 교황 선출에 귀족들이 개입하여 1년 동안 진통을 겪은 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경위는 다음과 같다.
767년 전임 교황 바오로 1세가 선종하고 로마 귀족들의 지도자였던 네피의 공작 토토가 767년 7월 자기의 동생 콘스탄티누스를 교황에 당선시켰다. 선출 당시 그는 평신도였다. 순식간에 사제품을 받고 주교로 승진되자 전임 교황 바오로 1세의 공증인들 중의 하나인 크리스토페루스가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고 파비아로 도주하여 롬바르드족의 왕 데시데리우스에게 가서 이 사정을 알렸다. 데시데리우스는 왈디페르트 신부와 크리스토페루스의 아들 세르지우스에게 군대를 주어 로마를 공격하게 하였다. 공작 토토는 살해되고 그의 동생은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피하였다. 롬바르드군은 수도자 필리푸스를 교황으로 뽑았으나 크리스토페루스가 도착하여 그를 사임하게 하고 스테파노를 법적으로 선출하였다.
스테파노 4세는 신앙심이 깊었으나 너무 유약한 성격이라서 아래 사람들을 통솔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타락하여 판단력을 잃고 말았다. 왈디페르트 신부는 살해되었다. 스테파노 4세가 769년 4월 라테라노 지방 공의회를 열자 크리스토페루스의 요청으로 프랑크 왕국의 주교 13명이 참가하였다. 회의에서 비합법적인 교황 콘스탄티누스를 종신형을 결정하고 그의 사제품과 주교직을 무효화시켰으며 교황 선출을 보호하기 위하여 교황을 선출할 때 평신도의 참여를 거절하고 성직자들에게 완전히 일임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또한 성상 파괴를 결정한 히에레이아 지방 공의회를 단죄하고 성상 공경을 인정하였다.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회와 우호 관계에 있었다. 스테파노 4세는 샤를마뉴가 데시데리우스의 딸과 결혼하려는 제안을 극구 반대하여 프랑크 왕국과 롬바르드족을 자극시켰다. 그리하여 771년 데시데리우스는 그들이 교황좌에 앉힌 필리푸스의 퇴위와 왈디페르트 신부 살해 사건과 스테파노 4세의 결혼 반대 등으로 분개하여 로마를 순례자의 자격으로 방문하자 크리스토페루스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로마 시를 무장시켰다. 스테파노 4세는 우연히 프랑크 왕국과 적대하게 된 것을 알고는 데시데리우스와 화친을 맺고 크리스토페루스를 그들에게 내주자 그들은 그를 살해하고 말았다. 스테파노 4세가 프리스토페루스를 배척하여 죽게 했다는 소식을 들은 카를로만은 죽기 전에 스테파노 4세에게 복수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그는 스테파노 4세의 선종 얼마 전인 771년 12월에 사망하였다.
전 임 바오로 1세 |
제94대 교황 767년 8월 1일 ~ 772년 1월 24일 |
후 임 하드리아노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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