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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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金敎臣,1901년-1945년)은 민족적 기독교를 주장한 무교회주의 종교사상가, 출판인, 교육자이다.
[편집] 생애
1901년 함흥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부터 1927년까지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敎)에서 지리학을 전공하였다. 이때 그는 脫서구화한 일본의 기독교 사상, 즉 성서 중심의 무교회주의를 주창한 종교사상가 우치무라 간조 (內村鑑三)의 문하에서 함석헌, 송두용 등과 함께 성서를 공부하였다. 귀국 후 그는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기 위한 무교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김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는 교회라는 조직과 그 속에서 유지되어 온 형식이 아닌, 예수와 성서 위에 세워진 조선을 위한 기독교였다. 양정고등보통학교 등에서 지리학과 박물학 등의 교사로 교육에 전념하면서, 성서조선 잡지를 발행하는데에 진력하였다. 하지만 1942년 이른바 성서조선의 권두문 '조와'(얼어죽은 개구리라는 뜻) 로 인한 필화사건이 발생하여 옥고를 치르고, 성서조선은 폐간 당하였다. 이후 함흥 비료공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945년 봄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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