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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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金昌龍, 1916년 7월 18일[1] ~ 1956년 1월 30일)은 일본군과 대한민국 국군 군인이었으며, 김구 암살의 배후로 종종 지목받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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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일제 강점기
함경남도 영흥 출신이다. 1940년부터 만주에서 관동군 헌병보조원과 헌병 이등병으로 근무했다. 그는 1941년 소련 국경 부근에서 첩보 부대원으로 이력을 시작하여 이후 평생 정보 공작의 전문가로 살아가게 된다.
1943년 그는 상하이에서 파견되어 활동 중이던 중국공산당의 왕근례(王近禮)를 체포하였고, 이로 인해 왕근례가 이끌던 비밀 조직이 일망타진되는 성과를 올렸다. 김창룡은 공로를 인정 받아 오장(伍長)으로 진급하였으며 이후로도 많은 비밀 조직을 적발하는 공을 세웠다.
[편집] 광복후
광복후 고향에 돌아왔는데, 북조선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두 차례나 체포되었다가 탈출했다. 1946년 결국 월남하였고,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속성으로 졸업한 뒤 1947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는 첩보 부대에 근무한 경력으로 쓰임새를 인정 받아 정보소대 소대장을 맡았으며,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한 소련군 장교의 사진 촬영 사실을 적발해 그를 추방하게 하는 등 곧 능력을 드러냈다.
북조선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김창룡은 반공 전선의 일선에 섰다. 남로당 간부들인 이재복, 이중업, 김형육, 김영식, 김동산, 안소주 등을 각각 체포하였고, 남로당의 거물인 김삼룡, 이주하도 그의 손에 체포되었다. 군내에서 송호성 등이 좌익과 연계를 갖고 있다며 숙군 작업도 주도했는데, 그에게 용공 세력으로 지목 받은 장교들은 대개 광복군(송호성)이나 중국군(오동기) 소속으로 항일 활동을 하던 인물들이었다.
한국 전쟁 때는 부역자를 가려내 처벌하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을 맡아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고, 대통령 이승만의 각별한 신임 속에 제1공화국의 각종 공안 사건들을 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그가 처리한 대부분의 용공 사건, 간첩 사건들은 후에 조작이라는 진술이 나왔다.
예를 들어 1949년 제14연대장 오동기 등이 연루된 인민해방군 사건이나, 1950년 남로당 이강국의 연인이라는 김수임을 체포해 처형한 사건, 소총을 관 속에 숨겨 대구로 이동하던 불순 분자들을 적발한 사건, 부산 정치 파동의 빌미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사건 등이 있다. 1953년 발생한 국제간첩 정국은 사건도 사형 당한 언론인 정국은이 실은 간첩이 아니었고 이범석의 족청계 숙청을 위해 김창룡이 조작한 사건이라는 설이 있었다. 동해안 1군단이 연루된 동해안 반란사건, 1955년 한국 전쟁 때 북으로 간 조소앙이 이승만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개천절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편집] 사망
특무대를 이끌며 군에서 좌익 세력을 솎아내는 숙군 작업을 주도한데다, 일제의 헌병으로 일하면서 배운 공작 기법과 고문 수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조작 사건을 무수히 일으킨 것으로 평가된 그는 군과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적을 많이 만들었고, 결국 1956년 1월 30일 새벽에 자신의 집과 가까운 노상에서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범인은 한달 후에 그의 특무대 부하였던 허태영(당시 대령) 등 현직 군인들로 밝혀졌다. 허태영은 김창룡의 전횡과 비리를 보다 못해 군 민주화를 위해 거사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다른 배후가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정확한 진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편집] 김구 암살 사건
그는 제1공화국 시절 각종 정치적 음모의 중심에 있었으며, 특히 김구의 암살을 지시했다는 설 또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될 때 김창룡은 육군본부 정보국의 방첩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체포된 안두희에게 여러 편의를 보아준 사실이 있다. 심지어 김창룡이 김구 암살의 배후일 뿐 아니라 역시 김구 암살과 관련이 있던 채병덕, 장은산, 신성모의 입을 막기 위하여 이들의 죽음에도 개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러한 소문들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편집] 평가
시신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으나 그가 국립묘지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 아직 계속되고 있다 [2].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편집] 각주
- ↑ 김창룡과 그의 묘갈에 따르면, 공식 문서에는 1920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 《오마이뉴스》 (2006.6.6) 김창룡 묘 이장 찬반 '맞대결' 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