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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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양(朴箕陽, 1856년 ~ 1932년)은 조선 시대의 관료이며 친일파 인물이다. 아호는 석운(石雲).
박제억의 아들이나 박제만에게 입적되었고, 1888년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에 올랐다.
그는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적극 반대하였다. 특히 을사조약 체결 때는 일본 헌병대에 구금되어 있기도 했으며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지냈다.
그러나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으면서 회유에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1918년 서화협회 고문, 1921년 친일 유림들이 모인 경학원의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1925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로 임명되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모두 선정되었다.
분류: 1856년 태어남 | 1932년 죽음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