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라트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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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해군의 항공모함 비라트는 원해 영국해군의 항공모함 허미즈였다. 허미즈는 2차대전 중이던 1944년 6월에 배의 등뼈라고 할 수 있는 용골을 놓은 꽤 오래된 배였고 원래 이름은 코끼리를 뜻하는 엘리펀트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해 2차대전이 끝나자 엘리펀트는 건조 공사가 일단 중지되었고, 그 해 11월에 이름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인 허미즈로 바뀌었다.
허미즈는 만들다가 만 상태로 거의 8년을 보낸 다음 1953년에야 진수되었고, 새로 발명된 증기 캐터펄트 2대, 경사비행갑판 (angled deck), 세계 최초의 3차원 레이더인 984형 레이더, CDS 레이더 데이터 처리 및 디스플레이 시스템을 갖추는 변경된 설계로 완성되어 1959년 11월에야 영국해군에 취역했다. 용골을 놓고 무려 15년이 지나서야 취역한 지각생 허미즈는 당시로서는 최신 시설을 갖추었지만 만재배수량이 27,800톤에 불과해 영국해군의 공격 항공모함 5척 중에서 두 번째로 작았고, 시빅슨 FAW1 전투기 12대, 핵폭탄을 운용할 수 있는 시미터 F1 전폭기 8대, 개닛 AEW3 조기경보기 4대, 기타 헬리콥터 6대, 모두 합쳐 30대의 항공기를 실었다.
허미즈는 1961년에 영국해군 극동함대로 파견되어 1964년까지 대서양이 아니라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수역, 다시 말해 “East of Suez”에 배치되어 있었고, 1964년 영국으로 돌아와 1966년까지 2년에 걸친 성능 개량 공사를 받았다. 새로운 버커니어 S2 공격기 7대와 개량된 시빅슨 FAW2 전투기 12대를 운용하게 된 허미즈는 1967년 4월에 공격 항공모함 빅토리어스와 교대하기 위해서 다시 “East of Suez”로 떠났고,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중요한 해상교통로인 티란 해협을 봉쇄한 1967년 5월에는 처음으로 실제 전투에 투입될 뻔 했다. 이 때 영국은 미국과 함께 다국적 함대를 조직해서 무력을 써서라도 티란 해협의 자유 통항을 보장하는 방안을 생각했고, 네덜란드해군, 캐나다해군과 일본의 해상자위대까지 이 다국적 함대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6월에 이스라엘이 “6일 전쟁”으로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자 다행히 허미즈가 싸워야 할 일은 없게 되었는데, 작은 허미즈가 이집트의 공군과 해군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어 이 때부터 공격 항공모함으로서 허미즈의 가치는 내리막길이었다.
너무 작아서 새로운 F-4K 팬텀 II 전폭기를 운용할 수 없었던 허미즈는 1970년에 영국으로 돌아와 증기 캐터펄트와 3차원 레이더를 떼어냈고, 헬리콥터 탑재 상륙함으로 (LPH) 개조하는 공사를 받은 다음 1973년에 다시 취역했다. LPH로서 허미즈는 소련과 국경을 맞댄 노르웨이의 북부 지방으로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병대를 실어 나르는 임무를 맡았다. 1976년부터 허미즈는 NATO의 요청에 따라 시킹 대잠수함전 헬리콥터를 탑재하기 시작해 대잠수함전 항공모함의 임무도 맡기 시작했고, 1980년부터는 시해리어 FRS1 수직이착륙 전폭기도 탑재해 다시 항공모함의 역할로 돌아왔다. 허미즈는 원래 해군항공대 800대대의 시해리어 FRS1 전폭기 8대를 실었는데 1982년 포클랜드전쟁 때 남대서양으로 출동하게 되자 여기에 훈련부대인 899대대의 4대가 더 추가되어 12대를 싣게 되었고, 826대대의 시킹 HAS5 대잠수함전 헬리콥터 9대, 846대대의 시킹 HC4 헬리콥터 9대까지 더해 모두 30대의 항공기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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