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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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鄭澈, 1536년 - 1593년)은 조선의 시인이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다.
명종 17년(156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강원도 관찰사.예조판서.대사간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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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문학사적 업적
《성산별곡(星山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훈민가(訓民歌)》 등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가사와 많은 단가를 남겼다. 그의 시는 한문투를 벗어나 자유자재로 우리말을 구사하였고, 시풍은 호탕하고 비장하다.
저서로는, 그 후손이 시조와 가사를 엮은 《송강가사》가 있다.
[편집] 작품 예
효(孝)를 주제로 시조의 한 예이다.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닯다 어찌하랴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편집] 사후
숙종조(1685년)에 '문청(文淸)'의 시호가 내려졌다. 1883년 음력 3월 16일 고종은 정철의 사판(祠版)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1]
[편집] 부록
[편집] 참고자료
- 조선왕조실록
- 정송강사 사적비
[편집] 관련 링크
[편집] 주석
- ↑ 1883년~: 《고종실록》20년 3월 16일: 敎曰: "故相臣文淸公鄭澈祠板, 遣地方官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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