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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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郭再祐, 1552년 ~ 1617년)는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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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1585년 과거를 보아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선조의 비위를 거슬린 까닭에 급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효가 되어 낙방되고 만다.
그 뒤 정계에 진출할 뜻을 포기하고 평생 은거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으나,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연이은 관군의 패배와 선조의 피난 소식이 날아오자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2천 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 활동으로 일본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하였고, 일본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 때 붉은 비단으로 만든 군복을 입고 아군의 맨 앞에서 싸웠기 때문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러한 그의 의병 활동의 공을 높이 사 같은 해 7월에 무관직을 내렸고,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12월에는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종식되자 벼슬을 버리고 다시 은둔 생활로 돌아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파행으로 결렬되고 일본과의 전쟁이 재발할 위험성이 커지자 조선 정부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마을에서 일본군을 막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여러 고위 무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대부분 사양하다 1616년 죽었다.
[편집] 사후(死後) 관작(官爵)
1618년 곽재우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건립되고 훗날 그 규모가 확장되어 예연서원(禮淵書院)이 되었으며, 1709년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란 시호가 내려져 충익공(忠翼公)이 되었다.
[편집] 읽어보기
- 《망우당집》(忘憂堂集) : 보물 제671호
- 《곽재우전》(郭再祐傳) : 곽재우의 일생을 소설화한 군담소설(軍談小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