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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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만세운동이다.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단체인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키는 것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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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사건의 배경
[편집] 조선의 농업경제 파탄
제1차 세계대전종전이후 쌀 폭동 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심각한 식량부족을 겪던 일본은 산미증식계획 시행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산미증식계획은 자작농들이 토지를 몰수당하거나 헐값에 팔아 넘기는 등 조선의 농업경제를 파탄시킨다. 당연히 조선학생들로서는 식량부족의 원흉인 일제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통학열차안에서 일본 학생들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을 계기로 조선학생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이 폭발하게 된다.
[편집] 일본의 우민화정책과 억압
일제는 조선인들을 우민화시키기 위해 고등교육 제한, 직업교육과 일본어·일본역사 교육 중심의 교육내용등을 실시하였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자치활동 금지,조선인 학생에 대한 무시, 교육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조선 학생들을 억압하였다. 결국 조선인학생들은 일본인 교육자들의 억압과 무시 그리고 우민화정책을 당하면서 항일의식을 갖게 되었다.
[편집] 활발한 사회운동
활발한 사회운동은 광주학생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실례로 광주학생독립운동당시 활약했던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는 전남청년연맹과 각 지역의 청년동맹, 신간회 지회에 참여하거나 연관을 가지고 활동한 사회운동경력자들이었다.
[편집] 광주학생운동의 진행
[편집] 일본인 학생들과의 충돌
1929년 10월 31일 나주역에 도착한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암성금자·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는 분노하여 항의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난투극이 벌어졌다. 박준채는 후에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가 "조센징"이라는 인종비하발언을 하는 무례함에 격분했다고 회상하였다. 이를 본 일본 경찰들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고, 광주고보 학생들은 차별에 대해 집단항의하였다. 당연히 조선인 학생들로서는 자기네 나라에서는 오단백성이라고 해서 지주에게 수탈당하던 일본인들이 동인도회사를 모방한 식민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이민 자격으로 조선에 와서는 지주행세를 하는 것도 화가 나는데, 그들의 자식들이 무례하게 굴자 분노가 폭발할수밖에 없었다.
[편집] 1차 광주학생운동
1929년 11월 3일(일요일)은 일본에게는 메이지유신의 상징인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치절(明治節)이었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음력 10월 3일 즉,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이었다. 한국인의 시조를 기념하는 날에 일본천황의 생일을 일본국가인 '기미가요'를 불러서 축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조선인 학생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하교길에 일본인학생들과의 충돌사건을 불공정하게 보도한 광주일보에 몰려들어가서 항의할 정도로 그들의 반일감정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광주고보의 조선인 학생이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에게 테러당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폭력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졸업생인 장재성의 설득이 아니었다면 한일 학생들간의 충돌은 더 심하게 번졌을 것이다. 한편 장재성등은 일제에 대항할 자세한 행동방향을 제시한다.
- 1. 우리의 투쟁 대상은 광주중학생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이니 투쟁 방향을 일제로 돌릴 것.
- 2. 광주중학생에 대한 적개심과 투쟁을 일제에 대한 증오와 독립투쟁으로 바꿀 것.
- 3. 광주중학생과 대치 중인 광주고보생을 해산시키지 말고 광주고보로 집합시켜 적개심에 불타는 학생들을 식민지 강압정책 반대 시위운동으로 돌릴 것.
- 4. 장재성이 시위운동을 직접 지도할 것.
- 5. 우리는 앞으로 다른 동지들과 연락하여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 계획할 것.
그리하여 장재성의 주도로 학생들은 광주농고 학생들과 함께 광주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용감히 적(일제)을 물리치자는 내용의 행진가를 부르는 가두시위를 하였다. 일제는 항일시위에 가담한 70여 명의 조선인 학생중 60여 명을 구속, 검사국으로 송치하는 탄압을 하였고 심지어는 개인의원인 태양의원에서 치료받던 학생들을 도립병원장이 치료할 가치도 없다면서 비하하는 망언을 하여 공분을 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등에서도 일제의 학생운동 탄압과 차별을 비판하는 기사를 보도할 정도였다.
[편집] 2차 광주학생운동
장재성은 광주학생들을 설득하는 유인물을 작성했으며,인쇄를 맡은 오쾌일에 의해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박기석의 집에서 약 1,000장을 인쇄하였다. 그리고 1929년 11월 12일 오전 8시 경 오쾌일은 광주고보와 광주농고의 학생들을 통해서 유인물을 배포한다. 당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여학생들도 교정에서 시위에 가담하였으며, 광주고보, 광주농고, 광주여자고보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대항하였다.일제는 250여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검거했으며, 사회운동단체 간부들도 검거당했다.학교측도 무기정학, 퇴학으로 광주학생운동 가담자들을 탄압했다. 당시 일제는 언론통제를 통해 광주에서의 학생운동이 전국에 번져서 전국규모의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어느 여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집에 못가게 한다는 헛소문이 돌게 해서 조선인들의 항일의식만 부채질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