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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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야(金丹冶, 1900년?~1938년)는 일제 강점기 해외에서 주로 활동했던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본명은 김태연(金泰淵).
1900년, 또는 1899년에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학생 운동에 뜻을 두다가 배재고보 재학 중 삼일운동 참가 혐의로 검거되면서 상하이로 활동 무대를 옮긴 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로 일했다. '화요파 트로이카', '화요 3인조'로 불리던 박헌영, 임원근과는 고려공산청년회와 화요회, 신흥청년동맹에서 함께 활동한, 가까운 동지 사이였다.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와 상하이, 국내를 오가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였다. 상하이에서 기관지《콤뮤니스트》를 발행했고 국내에서 6.10만세운동과 노동자 파업 운동을 주동했으며 모스크바에서는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하는 등 활발한 활동상을 보여준다.
1934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고, 그해 박헌영의 부인이었던 주세죽과 세번째로 결혼했다. 김단야에게는 고향에 본처가 있었으며 두번째 부인은 같은 운동가였던 고명자이다.
1937년 일본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다음해 처형당했다.
2005년 국가보훈처에 의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음으로서 독립운동가로 인정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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