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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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文益漸,1328년~1398년,호는 삼우당(三憂堂),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은 고려말의 문신이다. 한국에 면포를 만드는 목화를 전래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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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초기의 생애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출신으로 공민왕때인 136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를 지냈으며, 이후 순유 박사(諄諭博士)로써 좌정언(左正言)으로 승진하였다. 원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가는 이공수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갔다가 원나라 조정의 미움을 사 중국의 남쪽지방 운남의 검남(劒南)으로 3년간 유배되었다.
[편집] 목면의 전래
유배생활이 끝나면서 문익점은 목면(木緜)나무를 보고 씨앗 십여개를 몰래 들여왔다. 이후 진주(晉州)에서 장인인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하고 문익점 본인도 길렀는데 정천익이 심은 씨앗 하나만이 살아남아 자라게 되었고 이 하나로 부터 가을에 새로운 씨를 얻어 주위에 퍼뜨렸다. 현재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처음 목면을 심은 자리에 기념비가 남아있다.
이후 중국인 승려 홍원(弘願)이 실을 뽑고 베짜는 기술을 전수 하였고 정천익의 아들 문래(文來)가 물레를 만들고 제사법(製絲法)을 발명하였으며, 그의 손자 문영(文英)은 면포 짜는 법을 고안하였다. 이렇게 재배에 성공한지 10여년 만에 온나라에 퍼지게 되었다.
[편집] 목화 전래의 영향
목화의 전래로 인해 한국의 의생활이 획기전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며 온 백성들이 이 혜택을 입게 되었다. 목면으로 포근한 솜과 튼튼하고 땀을 잘 흡수하는무명 옷감으로 의생활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고, 물레,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의 제작은 생산도구 제작의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 또한 탈지면은 지혈이나 외과치료용으로 쓰이고, 솜은 초나 화약의 심지로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튼튼한 무명실은 노끈, 낚싯줄, 그물을 만들어서 일상용품 여러곳에 두루 다양하게 쓰였다. 또한 조선시대에 무명은 물물교환의 화폐로 통화수단으로 이용되어 세금을 걷는 기본통화가 되었다. 또한 일본이나 중국과의 무역에 있어 주요 수출품의 하나였다.
[편집] 공로의 인정
1375년 조정에서 문익점을 불러 이러한 공로로 전의주부(典儀注簿)로 삼았고 이후 여러 번 승진하여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까지 이르렀다. 죽은후 조정에서는 문익점을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 강성군(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江城君)으로 증직(贈職)하였다. 후손으로 문중용(文中庸)·문중실(文中實)·문중계(文中啓)의 아들 셋이 있었다.[1]
태종때는 이러한 공로를 높이여겨 후손인 문중용에게 벼슬을 내렸으며 도천서원(道川書院)을 세웠다. 세종 22년(1440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세조때는 부민후(富民候)를 추봉하였다. 고종때에는 일부 유생들이 모든 백성의 만세에 이룬 공을 들어 이색과 함께 문묘에 모실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편집] 문지창의 기록
문익점의 증손인 문치창의 1464년 기록과 남평문씨의 가전을 담은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1819년)에는 다른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문익점은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원나라의 의도에 거부하였고 42일간 구류를 당했다가 그래도 계속 불복하니 남쪽지방인 운남으로 유배되어 3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나 원나라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구했고 1367년에 귀국하면서 목화씨를 들여 왔다고한다.
[편집] 일본으로의 전래
조선의 목면은 일본으로 전해졌다. 태종 때부터 청목면을 일본사신에게 주는 하사품에 포함하였다. 15세기 후반에는 일본에서도 목면이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한해에 수천 필씩의 면포를 조선으로 부터 수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