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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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형(李德馨, 1561년 ~ 161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이자 동인(東人)의 일원이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민성(李民聖)의 아들이다. 이항복과는 어려서부터 이웃으로 같이 살며 절친하게 자란 것으로 유명하다.
[편집] 생애
어렸을 때부터 문학 실력이 뛰어나 1580년 우수한 성적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등을 역임하다가 1592년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겐소, 다이라 등 일본인들로부터 존경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玄蘇)과 화의 교섭을 했으나 결렬되었다. 그 후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여 허가받는데 성공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서울 방어를 강화하였으며, 1598년 우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1601년 4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가 되어 전쟁 종결 후의 군대 정비 및 민심 수습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1613년 이항복과 같이 인목대비의 폐위와 영창대군의 처형을 강하게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되어 양근(楊根)으로 귀양을 가서 그 곳에서 죽었다.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편집] 주요 저서
- 한음문고(漢陰文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