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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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花郞徒)는 국선도(國仙徒), 풍월도(風月徒), 원화도(源花徒), 풍류도(風流徒)라고도 한다.
[편집] 화랑도에 관한 기록
- 무리를 뽑아서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을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 데 대요(大要)를 삼는다 -- 삼국유사
- 처음에 군신(君臣)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거용(擧用)하려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 서로 도의를 닦고, 서로 가악(歌樂)으로 즐겁게 하며, 명산과 대천(大川)을 찾아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중의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 현좌(賢佐:賢相)와 충신이 이로부터 솟아나고, 양장(良將)과 용졸(勇卒)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 --삼국사기의 화랑세기 인용
- 우리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바 이를 풍류라 한다. 이 교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이는 실로 유, 불, 도 삼교를 포함하고 모든 중생을 접촉하여 교화하였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와 부모에 효도하고 나아가서 나라에 충성하니, 이는 노나라 사구, 즉 공자의 주지이다. 지어내지 않는 일에 마음 스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니, 이는 주나라 주사, 즉 노자의 종지이다.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만 받들어 행하니, 이는 축건태자, 즉 석가의 교화이다. -- 최치원, <난랑비서>
그 설치연대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576년(진흥왕 37)이라 하고 있다. 그런데, 562년에 이미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대야성(大耶城:高靈)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화랑도에는 그 지도자에 화랑이 있고 그 밑에 낭도가 있었는데, 초기의 화랑도는 조직도 미미한 것이었으나 576년 이후 국방정책과 관련하여 이를 관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총지도자에 국선(國仙:源花, 花主)을 두고 그 밑에 화랑이 있어 각각 문호(門戶:編隊)를 맡았다. 화랑도의 총지도자인 국선은 원칙적으로 전국에 l명, 화랑은 보통 3∼4명에서 7∼8명에 이를 때도 있었으며, 화랑이 거느린 각 문호의 낭도는 수천 명을 헤아렸다.
[편집] 화랑도의 기원
화랑도의 기원 및 정체에 대해서는
-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사(武士)들이 화랑도화하였다는 설(申采浩)
- 조선 고유의 신앙단인 부루교단(敎團)에서 연유하였다는 설(崔南善)
- 원시 미성년집회에서 연유하였다는 설(李基白)
- 무의 신라 시대 형태라는 설 (조흥윤 1997)
등이 있다.
[편집] 환단고기에 기록된 화랑
- 단군 흘달 20년 무술(戊戌)년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었다. 미혼(未婚)의 자제들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니,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밖으로 돌아 다닐 때는 머리에 천지화(天指花)를 꽂았으므로, 이때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 불렀다.
- 원화(源花)는 여랑을 말하며 남자를 화랑이라 하며 천왕랑天王郞이라고도 하니, 임금의 명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하사받았다. 모자를 쓰는데 있어서도 의식이 있는데 “큰 나무를 모시어 환웅의 신상神像이라 하고 이에 경배한다. 이 신령스런 나무를 웅상(雄常)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상(常)은 환웅이 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 살생에 법이 있었으니 살생을 함에 있어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었다. 옛부터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 죽이지 않고 방생한다 함은 역시 이런 뜻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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