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帝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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格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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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方语言 | 韓語(諺文) | |||||
首都 | 漢城(都城、京) 1897年~1910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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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大城市 | 漢城、濟物浦 (?) | |||||
皇帝: | 純宗皇帝(李坧) | |||||
面积 - 总面积 - 水域面积百分比 |
220,186平方公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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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立日期 | 1897年10月12日 | |||||
解散日期 | 1910年8月22日, 韩日合并条约 | |||||
国歌 | 大韓帝國愛國歌 | |||||
政府體制 | 君主專制 | |||||
首任君王 | 光武皇帝(高宗李熙) | |||||
末任君王 | 隆熙皇帝(純宗李坧) | |||||
时区 | UTC +9² | |||||
先前國家 | 朝鮮國 | |||||
繼承國家 | 朝鮮總督府(日本統治) |
大韓帝國(대한제국, 1897年10月12日—1910年8月29日)是朝鮮半岛历史上的一個王朝,君主的本貫是全州李氏,建都漢陽(即今日首尔漢江以北地區)。1896年,甲午戰爭後,李氏朝鮮終止與清朝的冊封關係,改國號朝鮮為大韓帝國,所以大韓帝國常被歸入李氏朝鮮歷史內。大韓帝國由開國君光武皇帝(高宗李熙)開始,历经2代君主共十三餘年,其後,1910年日韓合併條約後,日本侵吞朝鮮,大韓帝國灭亡。
大韓帝國的國土相當於朝鮮王朝,北方以鴨綠江和圖們江與中國為界。王朝的首都為漢城(今首爾),直到1910年被日本吞併。
目录 |
[编辑] 歷史
[编辑] 帝國成立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으로 인해 외세로 인하여 나라의 자주성이 크게 위협받게 되자 자주적 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갔다. 그래서 1897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해, 그 해 8월 17일 광무란 연호를 쓰기 시작하고, 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하였다. 고종은 자주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나라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으며,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나라의 이름을 대한제국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각국은 대한제국을 직접적·간접적으로 승인하였다. 그 중 러시아와 프랑스는 황제가 직접 승인 축하하였으며 영국, 미국, 독일 등도 간접적으로 승인 의사를 표시하였다.[1]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열강들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즉위 직후인 11월 12일 미루었던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렀으며, 11월 20일에 독립문을 완공하였다.
그런데 이 제국을 성립하기까지 서로 연합하였던 독립협회와 수구파는 정부 형태 문제로 대립하여 갈등을 빚었다.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반면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주장하였다.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여 1898년 11월 중추원신관제를 공포했다. 그러나 수구파들은 이에 대해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해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고 조병식을 중심으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독립협회 세력을 꺾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이 수구파 정부에 가담, 독립협회의 운동을 탄압하도록 권고하자 고종이 이를 받아들여, 萬民共同會(만민공동회被強制解散,而獨立協會亦於1898年12月被解散。
이렇게 수립된 수구파 정부는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시정 방향을 제시하고, 1899년 일종의 헌법인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하여 황권의 절대성을 명시하였다. 이어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지계를 발급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마련하였고, 상공업 진흥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도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들의 간섭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编辑] 國權侵奪和主權守護運動的展開
일본은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한일 의정서를 체결할 것을 강요하고, 나아가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또 1904년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일어나, 이듬해 포츠머스 조약의 체결로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1905년 일방적으로 을사 조약의 성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사회의 각계각층에서는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민영환 등은 자결로써 항거하였으며, 조병세 등은 조약의 폐기를 요구하는 상소 운동을 벌였다. 또 5적 암살단 등이 조직되어 5적들의 저택을 불사르고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하였다.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등은 을사 조약의 폐기와 친일 내각의 타도를 내세우고 무장 항전을 벌였다.
또한 독립 협회가 해체된 뒤 개화 자강 계열의 단체들이 설립되어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면서 구국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보안회와 입헌 군주제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된 헌정연구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05년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 신민회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编辑] 國權強奪
由於在1907年發生了海牙密使事件헤이그 밀사 사건),日本在8月時威脅高宗,要求他退位,並把帝國軍隊解散。高宗退位後,純宗即位,改元隆熙(융희,參看朝鮮高宗讓位事件)。純宗即位後,日本強制新君再締結新協約,把大韓帝國政府的各府處交由日本人擔任次官。군대마저 해산하고 실질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은 다음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공포(庚戌國恥), 국권마저 강탈당하여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编辑] 統治者年號一覽
- 太皇帝(高宗) 年號:建陽/光武 (1896年以前用干支年號及檀君紀年)
- 孝皇帝(純宗) 年號:隆熙
[编辑] 年表
- 1897年 - 高宗改年號光武,称帝登极,终止与清朝的册封关系,改国名朝鮮为大韩帝国
- 1904年 - 第一次韩日协约
- 1905年 - 第二次韩日协约(韩日保护条约)
- 1906年 - 日本设置朝鮮统监府
- 1907年 - 海牙密使事件。第三次日韩协约。解散大韩帝国军队
- 1909年 - 安重根暗杀伊藤博文
- 1910年8月22日 - 《韩日合并条约》,被日本吞并
- 1910年8月29日 - 開設朝鮮總督府
[编辑] 相關條目
[编辑] 附注
- ↑ 《한국의 황제》, 이민원 엮음, 대원사, 2002년,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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