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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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9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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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9세(라틴어: Leo IX, 이탈리아어: Papa Leone IX)는 제152대 로마 교황(재위: 1049년 2월 12일 ~ 1054년 4월 19일)이다. 세속명은 브루노 폰 에기스파임-다게스부르크(독일어: Bruno von Egisheim-Dagsburg)이다.
1002년 알자스의 에기스하임에서 태어났다. 교황이 되기 전인 1027년 9월 9일 툴의 주교가 되어 클뤼니와 로렌의 쇄신에 영향을 받아 사목권 예하에 있던 여러 수도원들을 쇄신시키고 잦은 방문과 회의를 소집하여 쇄신을 독려하였다. 가까운 친척 사이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3세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교황의 수기 기록자 실바 칸디다의 훔베르트에 의하면 교황은 로마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이 원하여 교황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교황의 주위에는 젊은 개혁가들이 여러 명 있었다. 르미르몽의 위그, 로렌의 프레데리크, 국무성성 장관 훔베르트, 힐데브란트 등 모두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교황은 6개월 이상 로마에 있지 않았다. 이탈리아 반도,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헝가리 등지를 순회하면서 로마와 먼 지방인들에게 교황의 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로마, 파비아, 랭스, 바리, 마인츠 등에서 12번의 지방 회의를 소집하고 평신도 서임과 성직매매 그리고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지하는 교령을 발표하였다. 교황은 수도원의 재산을 보호하고 성인들의 유해를 공경하게 하였으며 베르첼리에서 성체 교리를 잘못 가르친 투르의 베렌가리우스를 단죄하였다.
레오 9세는 하인리히 3세와 조화를 이루었으나 이탈리아 안에서 황제의 총대리격에 불과하였다. 교황은 콘스탄티누스 증여 문서에 자극을 받아 이탈리아 남부를 침범하는 노르만족을 무력으로 막아 줄 것을 비잔티움 제국에게 요청하였으나 황실의 반대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케룰라리우스의 반감만 사게 되었다. 교황은 1053년 6월 18일 치비타테에서 노르만족과 회담을 가졌으나 실패하고 바리 근처에서 감금되었다. 이에 교황은 1054년 훔베르트를 비잔티움 제국에 보내어 비잔티움 제국과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로마 교황청이 삼자 동맹을 맺어 노르만족에 대항하자는 제의를 전하였으나 훔베르트와 케룰라리우스의 무책임한 결정들로 인해 오히려 관계가 더 악화되고 말았다. 교황은 패배로 지친 데다 말라리아에 걸린 몸을 이끌고 로마로 귀환하여 선종하였다.
전 임 다마소 2세 |
제152대 교황 1049년 2월 12일 ~ 1054년 4월 19일 |
후 임 빅토르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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