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심플리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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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리치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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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심플리치오(라틴어: Sanctus Simplicius, 이탈리아어: Papa Simplicio)는 제47대 로마 교황(재위: 468년 3월 3일 - 483년 3월 10일)이다.
《교황의 책》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카스티누스이며 티볼리 태생이다. 심플리치오는 가까운 전임자들과는 달리 사건들을 처리하기보다는 주시하는 입장이었다. 재위 중 이탈리아에는 크나큰 변화가 일어났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는 헤룰레스족의 추장이자 로마 용병의 대장이 된 오도아케르에 의해 폐위당하여 나폴리로 쫓겨나고 제국의 깃발은 유명무실한 동로마 제국 밑에서 새로운 이탈리아의 왕(오도아케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또한 서유럽 도처에서 야만족의 왕국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교회와 새 국가들의 관계는 대체로 좋았으나 히스파니아 교회는 아리아니즘에 빠진 비시고트족(서고트족)에 의해 박해를 당했고, 아프리카 교회에도 아리아니즘에 빠진 반달족에 의한 박해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카치우스는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 사항 28항에 대한 교황 심플리치오의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한때 단성론자들은 중요한 교구, 즉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등에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바실리스쿠스 황제가 정통파와 단성론파를 화해시키기 위하여 발표한 칙서는 칼케돈 공의회와 교황 레오 1세의 책(Tomus)을 단죄하였다. 한편 아카치우스는 바실리스쿠스에 대한 두려움과 칼케돈 공의회의 문제의 28항에 관한 심플리치오의 태도를 싫어하여 바실리스쿠스에게 사건 전모를 알리지 않았다. 심플리치오는 바실리스쿠스와 아카치우스에게 서한을 보내어 단성파 총대주교 티모테우스 엘루루스를 알렉산드리아에 복귀시키는 데 관심을 보였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한편 제논 황제가 권좌에 복귀하자 칼케돈 공의회의 정통성이 드러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심플리치오는 티모테우스를 추방한 황제의 칙서를 받았으나 그의 후임자를 제거하는 데는 황제나 아카치우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후임자는 단성론자였던 페트루스 몬구스로 결정되었다. 총대주교도 잠시 동안 안티오키아를 떠나야만 했다. 황제와 총대주교는 화해 정책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몬구스의 도움을 받아 아카치우스가 준비한 헤노티콘을 황제의 칙령으로 482년에 반포하였다. 그것은 정통적인 것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핵심을 회피하고 있었으니 사실 칼케돈 공의회와 교황 레오 1세의 책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몬구스가 정통파 티모테우스 살로파치올루스가 492년 2월에 사망한 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되자 아카치우스는 심플리치오를 떠나고 말았다. 그 때 심플리치오는 중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결국 헤노티콘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심플리치오는 재위 중 로마에서 공공건물을 교회의 용도로 사용하였다.
전 임 힐라리오 |
제47대 교황 468년 3월 3일 - 483년 3월 10일 |
후 임 펠릭스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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