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온지 긴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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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 公望, さいおんじ きんもち, 카에인(嘉永) 2년 10월 23일 (1849년 12월 7일) ~ 쇼와(昭和) 15년 (1940년 11월 24일) 은 일본의 정치인이다. 일본의 공가, 정치가, 제 12, 14대 내각총리대신, 정2위 대훈위 공작. 1924년에 마쓰가타마사요시가 사거한 후에는, 최후의 원로로서 다이쇼천황, 쇼와천황을 보필했다 교토에 있는 명문 대학교인 리쓰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學)의 창립자로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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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자라난 내력
사이온지 긴모치는 청화가清華家의 하나인 도쿠다이지가徳大寺家의 차남으로서 태어나 4세때에 동족 청화가의 사이온지가에 양자로 들어와 가독을 상속했다. 양가는 후지와라노 후사사키藤原房前를 시조로 하는 후지와라 북가 한원류의 혈통의 계통이다. 친아버지는 우대신 도쿠다이지 긴이토, 친형은 3번에 걸쳐 시동장이 되어, 내대신으로도 근무한 궁중의 실력자 도쿠다이지 사네쓰네. 바로 밑의 동생 류마로은 스미토모가의 데릴사위가 되어, 재벌을 계승해 제 15대 스미토모 키치자에몬(友純)의 이름을 계승해, 장기간 재계에 군림했다. 그리고 막내아우 타케마로는 외가의 스에히로(末弘)가를 이어, 후에 사립 교토 법정학교(현재의 리츠메이칸 대학)의 간사, 이사를 맡는다.
유년기에는, 거주지가 고세에 가깝고, 연령도 가까웠기에 우궁(후의 메이지 천황)의 놀이상대로 번번히 불리어 다녔다.
[편집] 에도막부 말기, 메이지 유신
사이온지에게는 이와쿠라 도모미나 산조 사네토미와 같은 에도막부 말기에 있어서의 정치적 공적은 거의 전무했다. 그저 토바․후시미의 싸움이 시작되었을땐 조정에서는 이것을 도쿠가와가와 시마즈가의 사적인 싸움이라고 보는 의견이 나오던 중에 적극적인 관여․주전론을 주장해 이와쿠라 도모미등의 토막파 공경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이후의 보신전쟁엔 산인도 진무총독, 아이즈구 정벌대참모로서 각지를 전전한다. 그 후엔 에치고부지사등을 역임했지만, 그당시 사이온지는 10대의 청년으로, 그 젊은 임관이 가능했던 것에서 가문의 후광이외의 이유를 찾아내는 것은 곤란했다. 또, 공경중에서 처음 양장으로 궁중에 참내해, 아직 많이 남은 양이파 공경의 노여움을 산 에피소드도 자기 저서 (陶庵随筆)에서 피력하고 있다.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는 저서花神(かしん)에서 도막파 병학자 오오무라 마스지로가 사이온지를 후계자로 보고 있었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사이온지에게 「당신으로서는 군문을 향하지 않는 게 좋다.」라고 말했다 한다.
관직을 물러난 사이온지는 공가풍의 이름을 싫어해 「望一郎」로 개명한 후, 오오무라의 추천해 의해 1871년, 관비로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후에 감액을 신청한다) 그 인사를 하기 위해서 오오무라를 방문하기 직전, 친구가 갑작스레 찾아와 얘기가 길어진 그 사이에 오오무라 마스지로가 습격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선내에서는 지구가 구체인 것을 이해한 일이나, 백인소년에게 이별의 키스를 요청받아 당황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이 본인의 편지에 적혀있다. 유학중, 후의 프랑스 수상 클레망소나, 유학생 동료인 나카에 쵸민, 마쓰다 마사히사등과 친교를 맺어, 그 인맥은 귀국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또한 이 유학중에 파리 코뮌의 쟁란이 일어나, 사이온지는 그것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파리 유학으로 자유사상을 배운 사이온지는 자유민권운동에 심취, 나카에 쵸민, 마쓰다 마사히사등과 함께 1881년 3월 18일에 동양자유신문을 발행한다. 그러나, 사이온지가 자유민권에 가담하는 것을 싫어한 정부의 압력에 의해, 그는 퇴사를 종의받아 동양 자유신문은 4월 30일 발행 제 34호로서 폐간의 쓰라림을 맞게 된다.
[편집] 정치가로서의 사이온지
사이온지의 정치가로서의 캐리어는 1882년 이토 히로부미가 헌법 조사를 위해서 유럽을 역방했을 때, 거기에 수행했던 것으로 시작된다. 유럽에서 이토의 지우를 얻은 사이온지는, 1900년 입헌정우회 개양에 참가해, 1903년에는 총재가 되었다. 그 후 다이쇼 천황 즉위시에 원로의 반열에 올랐다.
사이온지는 사상적으로 자유주의(liberal)을 자칭하여, 중의원에서의 다수파 정당이 내각을 조직하는 헌정의 상도를 관례로 여겼다. 또 프랑스 유학의 영향탓인지, 친구미적으로, 군부등에서 국가주의에 반하는 사람으로 세계주의자라는 비난을 당하기도 했다. 사이온지는 정치력이 없었다는 견해가 많지만, 이것은 틀리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사후, 정치력으로 그에 상회하는 자는 당시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궁중․재계와의 인척관계를 배경으로, 그는 원로로서 궁중과 국무, 군부의 조정역을 맡아 일본의 정치를 리드해갔다. 또 문부대싱 재임중에 교육칙어의 개정을 시도하는 등, 쇼와초기의 국가주의적 정치가와 일선의 획을 긋는 언동을 산발적으로 보이며, 군부의 세롁확대에 저항했지만 그만의 힘으로는 전쟁 회피를 이뤄낼 수 없었다.
사이온지는 리츠메이칸 대학에 기증한 편액에 「후지와라 긴모치藤原公望」로 사이온지가의 본성인 후지와라의 성으로 이름을 적은 것처럼, 자신이 천년이상 황실과 함께 했던 후지와라씨의 말예로소이다-라는 의식이 강했고, 그것이 정치자세가 되었다. 즉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기 때문에 오류가 용서되지 않는 천황의 친정에 계속 반대했다. 이것은 다나카 기이치가 만주모중대사건의 상주의 불일치를 쇼와천황에 질책당해 내각이 총사직했을때, 사이온지가 천황에 누를 끼치는 것을 구실로 천황에 의한 다나카에의 질책에 반대하고 있던 것으로 봐도 분명하다. 또, 「입헌군주로서 신하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는다」라는 쇼와 천황의 신조는 사이온지의 영향으로서의 경향도 있다. 그렇지만 이 자세는 한편, 황도파 장교의 반감도 불렀다.
[편집] 제1차 호헌운동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기반으로 하는 여당 정우회가 중의원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 것도 있었기에, 재무행정개혁에 착수했다. 1913년 (다이쇼 2년)의 예산책정을 대상으로 세출 1할 삭감을 목표로 했지만, 육군은 2개사단의 증설을 요구하고, 해군도 또한 전함 3척 건조를 예산안에 포함시켰다. 육군은 사이온지 내각을 전복시켜서라도 2개사단 증설을 달성하기 위해 분주했고, 내각이 끝까지 거부방침을 내타냈기에 우헤하라 유사쿠 육군대신은 천황에게 직접 사표를 제출했다.
육군대신에게는 직접 천황에게 상주하는 유막상주가 제도상 인정되고는 있었지만, 각료가 수상을 통하지 않고 직접 천황에게 사표를 제출한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또, 육군이 후임육상을 내지 않는 한 사이온지 내각은 육상을 얻지 못한채 사임할 수 밖에 없어, 당시 육상사임의 영향은 매우 컸다(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사이온지는, 이후 다이쇼 천황에게 불려가 천황의 입에서 육상의 사표제출을 알게 되었다. 사이온지는 후임의 육상에 대하여 육군의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상담했으나, 야마가타가 후임의 육상을 낼 생각이 없는 것을 헤아리자, 기선을 억제해 총사직했다.
정우회를 통하여 내각 총사직의 내막이 널리 알려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갑자기 벌족타파, 헌정옹호의 기운이 높아져 제1차 호헌운동이 일어났다. 정우회는 입헌 국민당의 이누카이 츠요시등과 제휴해, 호헌운동의 진두에서 사이온지 내각의 후임내각인 제3차 가쓰라 내각과 대립했다. 다만, 정국제휴나 국민을 향한 연설회등에 사이온지는 직접 터치하고 있지 않은 것 같고, 이것들은 정우회의 간부로 있던 히라 다카시나, 마쓰다 마사히사등과 국민당의 이누카이 츠요시, 오자키 유키오가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의회는 원래부터 정우회가 절대다수였으므로, 의회가 개시되자 정우회․국민당은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해 가쓰라 내각은 궁지에 처했다. 거기에, 벌족측에서는 영국의 조지5세가 즉위한 때에, 즉위 직후인 것을 이유로 자유당과 보수당과의 정쟁을 금지하기위한 명령을 실현시켰다고 하는 이야기를 모방해, 흡사 다이쇼 천황이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으므로 칙어를 내는 형태로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정쟁을 중지하도록 설득했다.
정우회에서는 천황의 의사라면 거기에 따를 수 밖에 없다며 불신임안을 철회했고, 일단은 가쓰라 내각에 은혜를 배푸려는 의견이 한때 유력하게 되었지만, 이것에 국민당의 오자키 유키오가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이누카이 츠요시의 조언으로 사이온지는 정우회 총재를 사임해, 정우회 자체는 끝까지 내각퇴진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때에 해군의 야마모토 곤베에가 정우회 본부를 격려를 위해서 방문했다.
결국, 호헌운동의 고조로 가쓰라 내각은 1913년 2월 11일에 총사직해, 동일 후계수상을 결정하기 위한 원로회의가 열렸다. 이때의 회의에는 사이온지도 처음 원로로서 출석했다. 그러나 정우회의 대표로서 출석은 결코 아니었다. 회의에서는 처음엔 사이온지가 후계수상에 추천되었지만, 이것을 받으면 칙어에 반하게 된다고 하여 사이온지는 사양했다. 결국, 후계수상은 야마모토 곤베에로 정해졌다.
[편집] 쇼와
1926년(쇼와원년) 12월 28일, 천황의 위를 승계한 직후의 쇼와 천황은 사이온지에 대해 특별히 칙어를 내려, (대훈위 공작 사이온지긴모치에게 주는 칙어) 이것에 의해 사이온지가 유일한 원로로서 내각총리대신 주천의 직무를 떠맡는 것이 사실상 확립됐다. 그는 1940년, 요나이 미츠마사 내각 탄생때까지는 어떠한 형태로든 수반지명에 계속 관여하게 된다. 1936년의 2․26사건때는, 궐기장교의 일부가 사이온지 습격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습격을 주장하는 사람은, 원로 사이온지를 군측의 간사한 수괴로 보고 있었던 것에 비해, 부정파는 사이온지를 천황과의 파이프로서 이요하는 것을 표면상의 구실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쿄 스루가타이의 본가외에, 시즈오카현의 고텐바쵸의 우편선총별장, 같은 시즈오카현 오키쓰의 자교소, 교토의 세이후소우의 각 별장에 은둔생활을 하며, 원로로서 중심을 이루었다. 최후의 만년이 되면, 피서를 위해서 고텐바에 체재하는 것 이외에는, 한해의 대부분을 겨울이 온난한 자교소에서 보내었다.
1937년의 고노에 후미마로 1차 내각 성립 이후엔 점차 정치의 표면으로부터 물러나, 계속 반대했던 일독이 삼국 군사 동맹 성립 2개월 후에 사망했다. 기대하고 있던 고노에도 배반당해, 수상에 추천한 일을 마지막까지 후회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도대체 어디로 나라를 끌고가는 것이냐”라고 전해진다.
1941년에는 고노에 내각의 브레인을 맡던 손자 키미카즈가, 조르게 사건에 관여했다 하여 체포당했다.
[편집] 사이온지와 교육
문부대신 시절의 사이온지는, 교양있는 시민의 육성을 중시해, “과학, 영어, 여자 교육을 중시하라“고 천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1890년에 이노우에 타케시등이 만든 교육칙어에 반대해,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교육칙어 개정허가를 얻은 것과 동시에, 제 2차 교육칙어의 작성에 임했다. 이 2차 교육칙어의 초안은, 사이온지가로부터 리츠메이칸 대학에 기증되어 현존하고 있다.
또, 이하의 교육기관의 설립에도 관여하고 있다.
1869년 사숙, ‘리츠메이칸‘ 창설, (교토부청 태정관 류수관의 차출명령에 의해 약 1년만에 폐쇄되었다)
현재의 리츠메이칸 대학은 문부대신 당시의 비서관 나카가와 코주로가 그 가명을 양도받은 것으로, 조직적, 역사적인 연결은 없다. 그러나 나카가와에 의한 리츠메이칸 대학의 전신인 교토 법정 학교 설립시에는 사이온지 긴모치의 친아우 스에히로 타케마로가 학원강사로 취임하고 있어, 다시 사이온지 긴모치가 숨을 거둔 1940년에는 사이온지 긴모치를 리츠메이칸 대학의 학조로 결정했다.
1880년 메이지 법률학교(현재의 메이지 대학)창설에 협력
1897년 제2제국대학 (현재의 교토대학)을 교토에 유치)
1901년 일본 여자대학의 설립 발기인․창립위원
[편집] 바깥고리
전 임 가쓰라 다로 |
제12대 총리 1906년 1월 7일 - 1908년 7월 14일 |
후 임 가쓰라 다로 |
전 임 가쓰라 다로 |
제14대 총리 1911년 8월 30일 - 1912년 12월 19일 |
후 임 가쓰라 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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