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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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尹世胄, 1901년 6월 24일 ~ 1942년 6월 2일)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명은 윤소룡, 호는 석정(石正)이다.
경상남도 밀양 태생이다. 세살 위인 김원봉과 같은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으며, 이후 평생 함께 독립 운동을 하는 동지가 되었다.
그는 밀양의 민족주의적 사립 학교인 동화중학을 다니며 학생 운동을 하다가,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 시위에 참가한 뒤 고향에 내려와 밀양 지역 만세운동을 조직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았으나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19세로 나이가 어린 편이었지만 윤치형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했던 것으로 드러나, 궐석재판에서 밀양 만세운동과 관련자들 가운데 가장 중형인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았다.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김원봉이 그해 11월 결성한 의열단에 가입했다. 주요 기관에 폭탄 투척으로 테러 행위를 벌이기로 한 의열단은 그와 신철휴, 윤치형 등을 국내로 파견했다. 윤세주는 이때 체포되어 1927년에 출옥했다.
그는 오랜 옥고에도 굴하지 않고 1932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난징의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뒤,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 전선을 구축한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에 송병조, 김두봉, 김규식 등과 함께 핵심 인사로 참가했다. 이 조직에는 김구 계열을 제외한 좌우익의 많은 운동 단체들이 참여했으며, 1933년 발족한 민족혁명당의 모체가 되었다.
1938년에는 군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정치위원을 맡았다. 조선의용대에서 손 꼽히는 이론가였던 그는 민족혁명당 편찬위원회 등에서 일하다가, 1941년 김원봉과 헤어져 박효삼과 함께 화베이 지방으로 북상하여 팔로군과 공동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이무렵 김원봉과 노선 차이로 갈등이 있었던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국공 내전으로 중국의 권력이 양분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 관할 지구에 전략적으로 분산 배치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1942년 4만명의 일본군이 총공세를 벌인 태행산 전투에서 조선의용군을 총지휘하며 일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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