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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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학문(秦學文, 1894년 ~ 1974년)은 한국의 언론인으로 일제 강점기의 친일 인물이다. 아호는 순성(舜星).
10대 초반이던 1907년부터 일본에 유학하여 게이오의숙과 와세다 대학, 도쿄외국어학교 등에서 두루 수학했다. 최남선과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교류한 사이였다. 귀국한 뒤 《경성일보》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었고, 《아사히 신문》의 경성지국에서도 근무했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는 조선총독부와 자금주 김성수 사이를 매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동아일부의 초대 정경부장, 학예부장, 논설위원을 맡았다.
동아일보 창간후 6개월만에 퇴사하여 러시아를 목적지로 한 여행을 떠났는데, 도쿄와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러시아에는 가지 않고 돌아왔다. 이때의 여행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이시영 등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고 있던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정탐 목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1].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는 최남선과 함께 주간지인 《동명》을 창간해 주간을 맡았고, 1924년부터 일간지인 《시대일보》로 개편, 발행하였다.
한동안 겉으로 드러나는 활동을 쉬다가 1930년대 중반 관동군 촉탁을 지내고 1936년 만주국의 국무원 참사관에 임명되면서 공식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이후 언론 활동은 일제가 만주국에서 발행한 관제 신문인 《만몽일보》의 고문을 지낸 것 뿐이다. 그는 일본 국책 기업의 간부가 되어 1939년부터는 광복 시점까지 만주생필품주식회사의 상무이사로 근무했다. 이 기간 중에 만주협화회 산하의 조선인보도위원회, 대화동맹 등 친일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1941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직에도 임명되었다.
광복후 일본에서 주로 지내던 그는 1957년 경에 완전히 귀국했다. 한국무역진흥회사 부사장(1952), 한국무역협회 일본지부장(1955), 전경련 부회장(1963) 등을 역임하며 재계의 대표급으로 활동했다. 부음 광고를 미리 작성해두어 그가 81세로 사망했을 때 이 광고가 동아일보에 실린 일화가 유명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모두 선정되었다.
[편집] 각주
- ↑ 정운현, 관동군 촉탁 · 만주국 고관 지낸 친일언론인 - 전경련 상임부회장 진학문, 《오마이뉴스》 (2004.5.23)
분류: 1894년 태어남 | 1974년 죽음 | 한국의 언론인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