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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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배경
1863년 조선 고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에 봉해지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가 집권할 당시 국제 정세는 열강의 제국주의 확장으로 인해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미국, 러시아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반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으며, 때에 따라 무력 도발 및 시위를 자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집권 초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병인양요(1866)의 발생과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이후 '수교통상반대'로 정책 기조를 급선회했다. 특히 1871년 신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수교와 통상을 금하였고 이것 때문에 척화비가 전국에 생겼다.
[편집] 내용
척화비에는 주문(主文)으로 다음 문구가 적혀 있다.
-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독음: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그 다음 작은글자로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독음:계오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이라 적혀있다. 이 뜻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함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이다. 당시 조선의 불안정했던 대외 관계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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