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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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수(韓昌洙, 1862년 ~ 1921년)는 조선의 관료이며 친일파 인물이다.
서울 출신이다. 대제학을 지낸 한장석의 아들로 태어나 한윤석에게 입적되었다.
1888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에서 주로 벼슬을 하였으며, 1895년에는 한성재판소의 판사를 맡기도 했다. 외국어에 능통하여 한성외국어학교, 한성사범학교의 교장직과 함께 유럽 지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바도 있었다.
외교 관계 쪽 관직을 맡으며 일본에 드나들면서 친일 세력과 가까워진 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제의 신임을 받아 고종과 순종 등 왕실을 전담하는 이왕직 장관도 역임했다.
그는 친일로 얻은 권세를 이용한 치부, 거침 없는 친일적 언행에 더하여, 이왕직 장관을 지내면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를 어린 나이에 일본에 유학 보내고 일본인과 강제로 결혼하게 하여 결국 정신병을 앓게 한 일로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한창수가 이왕직 장시국장 재직 중 고종이 사망했는데, 고종 독살설에 이완용, 이기용, 윤덕영, 한상학, 그리고 어의 안상호 등과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한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자신의 작위를 물려받은 아들 한상기와 함께 선정되었다.
분류: 1862년 태어남 | 1821년 죽음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 서울특별시 출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