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알렉산데르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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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3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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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알렉산데르 3세(라틴어: Alexander PP. III, 이탈리아어: Papa Alessandro III)는 제170대 로마 교황(재위: 1159년 9월 7일 - 1181년 8월 30일)이다. 세속명은 롤란도 반디넬리(이탈리아어: Rolando Bandinelli)이다.
1105년 이탈리아의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1140년 신학과 교회법을 전공하여 볼로냐에서 교수와 저술가로 활동하였다. 그리티아누스의 칙령을 주석한 롤란도 교수의 대전과 신학 논문인 명제집이 남아 있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된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와 코스탄차 조약을 협상하였다. 그 뒤 교황 하드리아노 4세의 가장 신임받는 추기경이 되어 친노르만 정책을 추진시켜 1156년 시칠리아의 왕 윌리엄과 협상하여 베네벤토의 조약을 성사시켰다.
1159년 교황 하드리아노 4세가 선종하자 대다수 추기경들은 롤란도를 지지하여 알렉산데르 3세로 명명했으나 소수의 추기경들은 옥타비아누스를 내세워 파비아 교회회의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힘을 입어 지지를 받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확대되고 더구나 밀라노까지 함락되자 알렉산데르 3세는 프랑스로 1162년 4월 12일 피신하였다. 황젠은 변방에도 몇 명의 친정부 주교들을 배치해 두어 정보를 얻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잉글랜드의 헨리 2세가 교황을 지지하고 나서자 여러 국가 원수들도 모두 교황을 지지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피신 중에도 교황은 투르에서 1163년 공의회를 개최할 수 있었고 상에서는 교황청을 설립하여 정상적인 교회 업무를 볼 수 있었다. 마침내 1165년 11월 22일 로마로 귀환하자 황제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자 황제는 뷔르츠부르크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모든 제후들과 성직자들에게 대립 교황 옥타비아누스를 계승한 파스칼에게 충성 서약을 하도록 지시하고 무력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침입할 준비를 하였다. 1167년 프리드리히 황제는 로마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7월 22일 황후 베아트리체와 함께 대립 교황에 의해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그때 천재지변이 일어나 황제의 군인들이 많이 죽었다. 교황은 베네벤토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독일 지역에서도 황제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롬바르드 연합은 강력하게 움직여 황제에게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1168년 9월 20일 황제가 세 번째 대립 교황을 세웠으나 알렉산데르 3세는 인내롭게 참으면서 황제와 결코 연락하지 않았다. 이때 동로마 제국의 마누엘 1세 콤네노스가 자신이 롬바르드 연합의 총수가 되면 교황을 돕겠다고 제안을 해왔으나 교황은 정중히 거절하고 사절을 보내어 종교적인 문제를 협상하게 하였다. 1176년 시스테르시안 수도자들과 군대의 도움으로 레냐노에서 롬바르드 연합이 승리를 하자 황제는 마침내 양보하여 1177년 베네치아의 평화를 성대하게 발표하고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을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교황의 사목권을 인정하여 교황과 화해하였다. 이 협정은 황제의 패배요, 교황의 승리였다. 교황은 1177년 8월 영예롭게 로마로 귀환하여 대립 교황과 그를 지지해 온 이들을 너그럽데 대해 주었다.
교황은 비슷한 시기에 잉글랜드의 토마스 베켓 대주교의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교황은 파리에서 대주교를 맞이한 적이 있었고 그를 지지하고 교회를 포함하여 국가의 완전한 통치를 원하던 헨리 2세의 정책에 반대하여 끝까지 교회의 입장을 내세우다가 살해된 대주교를 1173년 2월 21일에 성인으로 시성시키고 왕을 파문하였다. 헨리 2세는 교황이 지지한 베켓 대주교를 6년간 박해하였으나 뒤에 뉘우치고 교황의 뜻을 받아들였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교황은 통치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교황은 교수 자격증을 실시하게 하여 주교좌에 자격 있는 교수를 두어 교육시키도록 하였다. 에스파냐와는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고 스칸디나비아 반도 선교에 힘썼다. 성지 탈환을 위하여 십자군 모집 2차 칙령을 발표하였으나 무위로 끝났다. 교황은 프랑스 남부에서 일어나고 있던 카타리파의 움직임을 경고하고 교황의 선종 직전부터 종교 재판의 태동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신중성과 인내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이르기까지 중세 교황권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알렉산데르 3세는 교황권을 세속 군주들에게 많이 적용하지 못했으나 교회 안에서는 교황권의 우위성을 확립하였다. 재위 말기에 교황이 행한 여러 행적들로 칙령집이 만들어졌고 법률가 출신다운 교황의 뜻이 잘 새겨진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은 알피바와 발도파를 단죄하고 교황 선출 방법을 새로 정하여 투표장 참석 추기경들의 투표수 3분의 2를 획득해야 유효하게 교황에 당선될 수 있게 하였다.
전 임 하드리아노 4세 |
제170대 교황 1159년 9월 7일 - 1181년 8월 30일 |
후 임 루치오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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