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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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南宮檍, 1863년 ~ 1939년)은 조선 말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언론인이다.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이고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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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삶
서울에서 태어났다.
- 1884년(고종 21) 영어학교에 1년 다닌 후 P.G. 묄렌도르프의 견습생이 됨
-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원으로 상하이[上海(상해)]에 감
- 1889년 궁내부 별군직(宮內府別軍職) 역임
- 1893년 칠곡부사(漆谷府使) 역임
- 1894년 내부토목국장이 되어 탑골공원 공사를 맡음. 이 후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영문법과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
- 1898년 독립협회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자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 사장이 됨
- 1902년 러·일의 한국분할설과 러일협정 을 공박했다.
- 1905년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됨
- 1906년 양양군수(襄陽郡守)가 되어 양양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
- 1907년 대한협회 회장이 됨
- 1908년 교육월보를 간행하였고, 관동학회 회장이 됨.
- 1910년 - 1918년 배화학당(培花學堂) 교사로 9년간 재직
- 1918년 강원도 홍천군(洪川)의 모곡(牟谷)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무궁화 묘포(苗圃)>를 만듬
- 1933년 홍천 모곡리 무궁화 사건으로 체포되어 복역
- 1935년 복역 중 병으로 석방되었다.
[편집] 독립 운동가 활동
[편집] 독립협회 활동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는 창립총회를 가졌으며, 이 때 남궁억은 독립협회의 수석 총무로서 또 사법 위원을 겸하였다.
[편집] 홍천 모곡리 무궁화 사건
일제가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일장기와 벗꽃을 보급하고 장려하려는 것에 항거해 당시 모곡리의 감리교 전도사로 일하던 남궁억은 그의 동지들과 더불어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배포하였다. 남궁억은 1918년 자신의 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내려와 모곡 감리교회를 세우고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더불어 교회내에 4년제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무궁화 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무궁화 묘목을 가꾸어 보급하였으나 일제는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태우고, 이들을 구속하고 이 학교는 공립학교로 강제 편입시켜 버렸다.
[편집] 저서
- 통사략(동사략,東史略) 5권
- 죠션니약이 (조선이야기) - 아동용 한국사
[편집] 노래
- 무궁화동산
- 기러기
- 조선의 노래
- 찬송가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편집] 말
“내가 널리재를 넘어 학교까지 눈길을 오는 동안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왔고 없을 때는 내 스스로 길을 뚫어 여기까지 왔듯이 여러분처럼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교육을 받지 못한 농촌의 농민들에게 달려가 그들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1931년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홍천에서 300리 길을 걸어서 졸업식장에 도착해 남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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