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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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李儁, 1859년 1월 21일 ~ 1907년 7월 14일)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밀사 중 한 명으로,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었다가 화병으로 사망한 구한말의 우국지사이다. 아호는 일성(一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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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개화파 활동
함경남도 북청 출생이다. 어려서 한학을 익혔고 성장해서는 고향 부근에서 경학원을 설립, 교육 사업에 종사하다가, 상경하여 박영효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한성재판소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는데,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아서 박해받기도 할 정도로 강직한 근무를 했다고 한다. 1895년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가담해 활동하였으며, 을미사변으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돌아왔다. 일본에서는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했고, 돌아와서는 다시 독립협회에서 활동했으며, 상동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당시 상동교회는 전도사 전덕기를 중심으로 개화파 청년들이 많이 모여든 장소였다.
1902년에는 민영환의 비밀 결사 개혁당에 가담했으며, 1904년 공진회 회장을 지냈다. 공진회 활동으로 유배 생활을 한 뒤, 1905년 국민교육회 회장에 취임하고 보광학교, 오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계몽 운동에 힘썼다.
[편집] 헤이그 밀사사건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이동휘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종에게도 동의를 받아 특사로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이준이 정해졌다. 이준은 고종의 신임장을 들고 만주의 이상설, 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하여 헤이그로 향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일본과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맻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준은 헤이그의 숙소에서 객사했는데, 만국평화회의 불참으로 인한 울분을 못 이겨 앓다가 사망한 병사가 사인이었다. 그 증거로 당시 네덜란드 유력 일간지 《헤트·화데란트》1907년 7월 15일자 기사에서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온 차석대표 이준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이미 지난 수일동안 병환중에 있다가 바겐 슈트라트가에 있는 아무개 호텔에서 죽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장지연의 《위암문고(韋庵文稿)》등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이준이 할복 자살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으나, 이는 당시 일제의 억압에 대한 반일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준이 영웅화되면서 할복 자살설이 떠돈 것으로 추정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본래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봉환되었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편집] 참고문헌
- 《우리역사의 수수께끼》2권,"이준 열사는 과연 헤이그에서 할복자살했는가", P312, 이덕일, 이희근 지음,김영사.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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