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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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석(閔丙奭, 1858년 ~ 1940년)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 인물이다.
충청남도 회덕군(현 대전) 출생으로 1879년(고종 16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명성황후의 지원 아래 집권한 여흥 민씨 가문의 한 사람이었기에 출세 가도를 달렸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호위하여 이후 총애를 받았다.
1984년 성균관의 대사성과 도승지를 겸하는 요직에 임명되었고, 갑신정변 때는 일본으로 달아난 김옥균 암살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명성황후와 정적인 흥선대원군의 대결을 이용하려는 각국의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잠시 피해 있다가, 1888년 예조참판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또다시 고위직에 머물렀다. 특히 1889년부터 5년간 평안감사를 지내면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고 조병세의 탄핵을 받을만큼 악정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여흥 민씨 세력이 그랬듯이 그도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청나라와 내통하여 일본을 몰아내려다가 실패하여 유배된 바 있고, 삼국간섭 이후 풀려났다가 아관파천으로 친러파가 집권했을 때는 친러파의 거두였던 이완용과의 친분으로 내각에 기용되었다. 이후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이완용과 함께 친일파로 전향, 1905년 이토 히로부미 초빙 작업을 위해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1909년 자신과 밀착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저격당하자 장례식에 조문 사절로 다녀왔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경술국적의 한 사람으로서 적극 협력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에는 이왕직 장관이 되어 의민태자와 이방자의 정략결혼에 깊이 개입하였다.[1] 1925년부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5회 중임하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자작 작위를 습작 받은 아들 민홍기와 함께 선정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는 다른 아들인 민복기도 법조 부문 친일 행위자로 포함되어 있다.
이완용은 그의 처내종으로 사돈간이 되며, 절친한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편집] 가족 관계
[편집] 각주
- ^ 김삼웅, 《친일정치100년사》(동풍, 1995년) 145쪽.
경술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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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 윤덕영 | 민병석 | 고영희 | 박제순 | 조중응 | 이병무 | 조민희 |
분류: 1858년 태어남 | 1940년 죽음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 대전광역시 출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