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토 라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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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라투르(프랑스어: Château Latour)는 1855년의 보르도 포도주 공식 분류에서 선정된 5개의 프르미에 크뤼 중 하나인 적 포도주(또는 샤토)이다.
샤토 라투르는 보르도의 북서쪽 메독 레지옹의 포이약 코뮌의 바로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생쥘리앙과 경계에 있으며 가론 강 하구로부터 불과 몇 백미터 떨어져 있다. 이 농장에는 65헥타아르의 포도밭이 있고 매년 4만 상자 이상의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다. 포도주의 75%는 카베르네 소비뇽, 20%는 메를로, 2내지 3%는 카베르네 프랑과 프티 베르도이다. 이 샤토에서는 세 가지의 적 포도주를 생산한다. 즉,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랑 뱅 드 샤토 라투르, 1966년부터 생산되고 있는 레 포르 드 라투르, 1990년부터 생산되고 있으며 지역 이름을 딴 포이약 이렇게 세 가지이다. 그랑 뱅은 보통 75%의 카베르네 소비뇽, 20%의 메를로, 4%의 카베르네 프랑, 그리고 1%의 프티 베르도로 만들어진다.
[편집] 역사
이 곳은 적어도 14세기부터 소유된 농장이며, 14세기 후반에는 백년 전쟁 기간 동안 기습에 대비하여 강 하구로부터 300미터 떨어진 곳에 군사 요새가 지어졌다. 이 탑의 이름, 생-모베르 탑 또는 라 투르 앙 생-모베르에서 "라 투르"라는 이 곳의 이름이 생겨났다. 이 곳은 1453년의 카스티옹 조약 때까지 영국이 지배하였다.
그 당시의 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1620년대에 원형 탑(라 투르 드 생-랑베르)이 이 곳에 세워졌다. 이 탑은 이제 비둘기 둥지이지만, 여전히 포도농장의 강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포도농장은 14세기부터 존재하였으나, 라투르의 세계적으로 위대한 포도농장으로서의 명성은 알렉상드르 드 세구르가 이 곳을 상속받은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된다. 그는 1716년에는 샤토 라피트도 상속받았다. 1718년 그의 아들, 니콜라-알렉상드르 드 세귀는 샤토 무통과 샤토 칼롱도 사들여 재산을 확대했고 최상급 품질의 포도주를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샤토 라피트의 명성에는 뒤쳐졌지만, 라투르 포도주는 훌쩍 성장하였고, 1800년경에는 보르도 포도주 평균 가치보다 그 가치가 20배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1855년의 보르도 포도주 공식 분류에서 4개의 프르미에 크뤼 중 하나로 선정됨으로서 성장을 지속하였다. 1860년대에는 현재의 샤토가 지어졌다.
1963년에는 이 곳은 세귀 가문의 손에서 벗어났다. 즉 그 상속인이 샤토 라투르의 4분의 3을 영국 회사들인 "하베이즈 오브 브리스톨"과 "피어슨 그룹"에 팔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9년에는 이를 "얼라이드 도멕"이 11억 파운드에 샀고, 이를 다시 1993년에 프랑스인인 프랑소와 피노가 8억6천파운드에 샀다.
긴 수명으로 유명한, 우수한 생산년도의 라투르 포도주는 다른 어떤 훌륭한 클라렛 포도주보다도 숙성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또한 비교적 작황이 좋지 않은 생산년도의 경우에도 라투르는 꾸준히 우수한 포도주를 생산한다. 반면 다른 포도농장은 그렇지 아니하다. 라투르는 전 생산품목을 현대화한 최초의 그랑 크뤼이며 1960년대에는 발효 통을 오래된 오크 나무통에서 스테인레스 스틸로 바꾸었다.
[편집] 빈티지
샤토 라투르의 좋은 빈티지는 1945년, 1959년, 1961년, 1982년, 1990년, 1996년, 2000년, 2003년이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