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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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王仁)은 백제에서 일본에 건너가 한자와 유교를 전했다고 여겨지는 인물이다. 니혼쇼키에는 ‘와니(王仁)’, 고지키에서는 ‘와니키시(和邇吉師, 화이길사, 吉師는 백제 인명에 붙이는 존칭이다)’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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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역사 기록
왕인에 대한 기술이 있는 것은 일본의 역사서인 고지키, 니혼쇼키, 속일본기(續日本紀) 뿐이다. 각각의 기술은 다음과 같다.
[편집] 고지키
고지키에 의하면 왕인은 백제에서 건너온 현자로 여겨진다.
- 원문:百濟國 若有賢人者貢上 故 受命以貢上人名 和邇吉師 即論語十卷 千字文一卷 并十一卷付是人即貢進(此和邇吉師者、文首等祖)
- 번역:백제에도 해 현인이 있다면 헌상하라는 (오진 덴노의) 명령을 받아 (백제가) 헌상한 사람의 이름은 와니키시라고 한다. 논어 열 권과 천자문 한 권을 아울러 11권을 적어 헌상했다.
[편집] 니혼쇼키
니혼쇼키에 의하면, 왕인은 백제의 학자 아직기(阿直岐, 아치키)의 추천을 받아 오진 덴노의 초대에 따라서 건너와, 후에 일본에 귀화한 학자이다. 왕인에 의해서 논어와 천자문이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에 유교와 한자가 전해졌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천자문은 왕인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아직 편집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왕인의 실존을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니혼쇼키를 편찬했을 때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귀화했던 여려 명의 학자를 모두 동일한 인물로 정리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편집] 속일본기
속일본기에는 왕인의 자손인 左大史·正六位上의 후미노이미키(文忌寸), 모오트(最弟) 등이 그들의 선조 왕인이 한족으로 항우(項羽)의 후예라고 간무 천황(桓武天皇)에게 주상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부터 왕인은 낙랑군 출신으로 백제에 온 한족의 가계에 늘어서, 한고제의 후예가 된다. 이 기술이 사실이라면, 왕인은 313년의 낙랑군 멸망 후 백제로 망명한 낙랑 왕씨의 일원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편집] 한국에서의 왕인
대한민국에서 왕인은 일본에 문화를 전한 한국인으로 다뤄지고 있어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왕인이 일본에 문화를 전해 주었다’고 기술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 남아있는 역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는 왕인, 및 왕인에 비정되는 인물의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암군에서는 왕인이 태어났다는 집의 터를 왕인박사 유적으로 복원했고 매년 왕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왕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편집] 고금와가집의 카나서(假名序)에 있는 왕인의 작으로 여겨지는 노래
- なにはづに さくやこの花 ふゆごもり いまははるべと さくやこのはな
(나니와즈니 사쿠야 코노하나 후유고모리 이마와 하르베토 사쿠야 코노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