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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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가(李王家)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왕공족의 일개 가문으로 격하하여 불리던 명칭. 때때로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이 항목에서는 일제시대의 왕공족 가문으로써의 일제시대의 '이왕가'에 대해서 서술하기로 한다. 칭호는 한일합방 이후의 시점에 대해서는 왕공족으로써의 호칭을 기준으로 하며, 한일합방 이전의 시점에 대해서는 대한제국 황제 및 황족으로써의 당시 칭호로 하며, 필요할 경우 괄호안에 묘호나 시호를 병기한다.
1910년의 한일합방 조약의 제3조에는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 및 후예를 각기 지위에 상응하는 존칭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조한다'라고 명문화되어 있어 대한제국 황제에게 황제이었을 때에 준하는 칭호 등을 부여하기로 약속하고 있었다(제4조는 그 외의 한국 황족에 관한 유사 규정). 이 조약에 기초하여 왕공족 가문으로써의 이왕가가 성립되었다. 왕공족은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1947년 5월3일 새 일본국헌법 시행으로 그 신분을 잃었다.
아래와 같이 왕과 공의 신분을 받은 자에 대한 항목으로 내용 가운데에서 가족에 대해 기술하도록 한다.
목차 |
[편집] 덕수궁 이태왕 희
조선왕조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광무황제(고종).
- 이 부분의 본문은 덕혜옹주입니다.
이태왕 희의 딸인 덕혜옹주는 그의 만년인 1912년에 측실 양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일합방 뒤 1925년에 도쿄의 학습원에 유학하여 1930년 옛 쓰시마번 번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결혼하여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덕혜옹주는 결혼 전부터 정신 이상이 나타나고 있었으나 결혼후 더욱 악화되었다. 1955년 소(宗)씨 가문으로부터 이연당하고 1962년 귀국했다. 소 마사에는 와세다대학(이방자의 저서에서는 메이지대학이라고 되어있고 그것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잘못된 정보이다)을 졸업하고 일본인과 결혼했으나 그후 실종되어 행방불명되었다.
[편집] 창덕궁 이왕 척
-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제국 순종입니다.
광무황제와 황후 민씨(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남으로 1875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대한제국 성립과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일으켜 광무황제가 퇴위당한 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조선왕조 27대 국왕) 융희황제(순종)로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혼인은 하였으나 자손이 없다. 한일합방조약의 조인과 함께 대한제국 황제의 신분을 잃고 그 지위에 상당하는 이왕(李王)의 칭호를 메이지천황으로부터 받았다.
[편집] 이왕 은
- 이 부분의 본문은 의민태자입니다.
광무황제와 황귀비 엄씨(순헌황귀비)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영친왕 은(垠)은 1907년 융희효황제 즉위와 함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되었으나 어린나이에 일본에 끌려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다. 한일합방과 함께 왕공족 이왕세자에 봉해졌다. 1917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제29기), 이듬해 일본 황족 나시모토미야노 모리마사 왕의 제1왕녀인 마사코(방자)와 결혼하였다. 창덕궁 이왕 석이 붕어한 1926년에는 이왕가를 정식으로 계승하였다. 이왕 부부는 도쿄의 아카사카 저택(현재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별관)에서 생활했다. 이왕 은은 일본 군인의 신분으로 우쓰노미야 연대장 등을 거쳐 종전시에는 중장까지 승진하였다. 패전후 이왕 부부는 1947년 신분을 잃고 일본국적도 상실하게 된다. 허나, 이승만 정권은 그들의 귀국을 허가하지 않았고 두 사람이 귀국을 한 것은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난 다음인 1963년의 일이었다. 두사람 사이에는 장남 이진(생후8개월만에 급사), 차남 이구가 있다. 사후 의민태자(懿愍太子) 추존.
[편집] 이구
- 이 부분의 본문은 이구 (1931년)입니다.
이왕 은의 차남 이구(李玖)는 1931년 12월 29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전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유학하여 건축학을 배우고, 1958년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여성 줄리아 멀록과 결혼했다. 미국에 귀화하였다. 1963년 한국에 귀국하여 사업가로 활동하였으나 경영하던 신한항공이 1979년에 도산하였고 1982년에는 줄리아부인과도 이혼하였다. 이혼 후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2005년 7월 16일, 심장마비로 자신이 태어난 곳인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서거. 향년 73세. 사후 회은태손(懷隱太孫) 추존.
[편집] 이강 공과 그 자손들
[편집] 이강 공
- 이 부분의 본문은 의친왕입니다.
광무황제에게는 적남인 융희황제 외에 귀인 장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의친왕이 있었다. 의친왕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왕공족 제도 시행으로 '이강(李堈) 공'으로 불리게 된다. 항일독립운동에도 참가하였다.
이강 공에게는 공식적으로는 2명의 아들이 있었다고하나 실제로는 첩으로부터 얻은 자식들을 포함해 13남 9녀를 두었다. 그 가운데 11번째 아들이 가수 이석(李錫)이다. 이강 공의 많은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서자이다. 이석은 젊은 시절 한국에서 가수로써 흥했으나 살고 있던 궁궐이 국가에 몰수당하였기 때문에 한 때 미국으로 옮겨간 적이 있다. 이 이석의 딸이 현재 여배우로 활동중인 이홍이다.
회은태손 사후 대한제국 황실의 적통후계자로 전주이씨 대종약원에 의해 지명된 이원(李源)은 이강 공의 9째 아들 이갑(李鉀)의 장남이다.
[편집] 이건 공
- 이 부분의 본문은 모모야마 겐이치입니다.
이건(李鍵) 공은 이강 공의 장남으로 1909년 10월28일에 태어났다. 비는 해군 대좌 마쓰다이라 유타카(松平胖)의 제1녀로 백작 히로바시 다다미쓰(廣橋眞光)의 양동생인 요시코(誠子/佳子)이었다.
1930년, 육군사관학교를 제42기로 졸업하고 기병과(騎兵科)에 진학하여 육군대학을 51기로 졸업했다. 일본 육군 중좌로써 종전을 맞이하였다. 1947년 5월, 신헌법으로 평민이 되어 모모야마 겐이치(桃山虔一)로 개명하였다.
1950년, 일본국적을 취득하고 호적에 모모야마 겐이치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린다. 1951년 5월, 요시코 부인과 이혼. 요시코 부인과의 사이에 둔 2남3녀 가운데 장남과 장녀는 어머니쪽 호적으로 들어갔다.
이후 마에다 요시코(前田美子)와 재혼하여 1952년, 모모야마 고야(桃山孝哉, 가이세이가쿠엔(開成学園) 교감)을 낳았다. 1990년 12월21일 사망.
[편집] 이우 공
- 이 부분의 본문은 이우입니다.
이우(李鍝) 공은 이강 공의 차남이다. 비는 박영효 후작(조선귀족)의 손녀 박찬주(朴賛珠)이다.
육군사관학교를 45기로 졸업하고, 야중포병과에 진학하여 육군대학을 54기로 졸업하였다. 1945년 8월7일에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사망.
[편집] 관련항목
[편집] 바깥고리
- ((일본어)) 流転の王女・李方子(유전의 왕녀 이방자)
- ((일본어)) 旧李王家邸(구 이왕가 저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