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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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4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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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4세(라틴어: Pius IV, 이탈리아어: )는 제224대 로마 교황(재위: 1559년 12월 25일 ~ 1565년 12월 9일)이다. 속명은 조반니 안젤로 데 메디치(이탈리아어: Giovanni Angelo de Medici)이다.
[편집] 생애
1449년 3월 31일, 이탈리아의 북부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귀족 가문이었으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는 연고가 없었다. 아버지 베르나르디노 데 메디치는 밀라노의 당파 분쟁에 깊이 개입되어 오랫동안 감금 생활을 하였으므로 조반니는 어릴 때부터 인생의 무상함을 체험하였다. 집안이 빈궁하여 아버지의 친구 지롤라모 모로네의 도움으로 파비아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1525년 볼로냐에서 교회법과 시민법의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로마의 법원에서 일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의 인정을 받아 교황령의 여러 지역에서 행정을 담당하였고, 특히 1540년 가장 중요한 파르마의 책임자로 일하였다.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형 잔 자코모가 오르시니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자 교황청 내에서 조반니의 위치가 격상되었다. 1545년 12월 14일 시칠리아의 라구사 교구의 대주교가 되고 1547년 7월 23일에는 볼로냐의 교황청 사절단에 참가하였다. 바오로 3세 치하에서 15년간 봉직한 후 1549년 4월 8일에 추기경이 되었다. 조반니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원하고 교황 율리오 3세 선출에 기여하였다. 프랑스와도 좋은 관계를 맺었다. 조반니가 파르마에서 교황청 사절로 일할 때 형 자코모는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를 지휘하였다. 그는 교황 바오로 4세의 반(反)신성로마제국 정책과 우유부단한 교회 쇄신 정책에는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1558년 로마를 떠나 피렌체에서 코시모 1세와 함께 지냈다. 바오로 4세가 선종한 후 3개월이 지나도 새 교황이 선출되지 않자 마지막으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합의하에 조반니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 4세로 명명하였다. 로마 시민들은 조용하고 온건한 새 교황을 좋아하였다.
교황좌에 오른 후 제일 먼저 교황이 되기 위해 애를 썼던 카롤로 추기경을 제거함으로써 카라파 가문의 족벌주의를 단죄하였다.
비오 4세는 두 가지 면에서 뛰어난 교황으로 인정받고 있다. 첫째는 조카였던 카롤로 보로메오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국무성성 장관을 시켜 교회 쇄신을 추진한 점과 둘째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재개하여 종결 지은 것이다. 젊은 카롤로 보로메오를 국무성성 장관에 임명할 때 다소 잡음이 있었으나 사절들을 보내어 공의회를 움직이게 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0년간 중단되었던 공의회를 1562년 1월 18일에 재개하여 1563년 12월 4일에 성공적으로 종결시켰다. 공의회가 끝난 뒤 비오 4세는 추기경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기구는 후에 교황청의 성성(congregatio)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종교 재판을 완화시키고 교황 자신은 이단 심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전 임 바오로 4세 |
제224대 교황 1559년 12월 25일 ~ 1565년 12월 9일 |
후 임 비오 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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