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율리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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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율리오 2세(라틴어: Iuli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Giulio II)는 제216대 로마 교황(재위: 1503년 10월 31일 - 1513년 2월 21일)이다. 세속명은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이탈리아어: Giuliano della Rovere)이다. ‘전사 교황’으로 불릴 정도로 전쟁에 여러 번 참전하였으며, 예술을 애호하여 로마를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즉위 이전
1443년 이탈리아 사보나 근처 알비솔라에서 양치기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삼촌이 프란체스코 수도회 총장이었을 때 페루지아에서 수도사들과 함께 수학하고 신부가 되었다. 1471년 삼촌이 교황 식스토 4세가 된 후 그는 카르펜트라스의 주교가 되었다. 식스토 4세나 인노첸시오 8세로부터 8개의 주교령을 하사받고 아비뇽의 대주교가 되어 여러 수도원과 성직록을 받았다. 1480년부터 1482년까지 그는 프랑스에 교황청의 사절로 파견되어 부르군트 세습에 관해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난 대립을 해결하였다. 식스토 4세가 선종했을 때 바티스타치보 추기경을 지지하여 교황 인노첸시오 8세로 당선시켰다. 이후 그의 권세는 상승 일로였다.
당시의 추기경단 중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또 한 명의 인물인 로드리고 보르지아와는 당연히 적수가 되어 서로를 라이벌시 하며 대립하였다. 그러나 1492년의 콘클라베에서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 후, 거액의 뇌물로 추기경들의 표를 마구 산 보르지아 추기경에게 패하였다.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선에서 진 로베레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로마 근교 마리나와 오스티아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거주하였다.
나폴리 왕국에 대한 왕위계승권을 노리는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 반도를 침략하기 전에 로베레는 왕이 교회의 쇄신을 지지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프랑스 왕국으로 도주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군과 함께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여 교회 쇄신을 위하여 공의회 소집을 주장하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퇴위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소원대로 알렉산데르 6세의 저항을 무마시키고 로마 입성에 성공했다. 그러나 샤를 8세는 알렉산데르 6세와 협상을 벌여 사건을 무마시키고 말았다.
그 후, 1498년에 일단 알렉산데르 6세와 형식상 화해를 하지만 보르지아 가문 타도의 야망을 버리지 않았으며, 1503년 알렉산데르 6세의 선종 후, 로베레는 밀라노의 피콜로미니 추기경을 지지하여, 새 교황 선출에 큰 역할을 하였다. 교황 비오 3세가 된 피콜로미니의 단명은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만장 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어 율리오 2세로 명명하였다.
[편집] 재위기간
율리오 2세는 재위 초기부터 교황청을 둘러싼 복잡한 권력 관계나 강대국들의 영향력을 일소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보르지아 가문에 의해 황폐화된 교회들을 복구하고, 전쟁을 통해 교황청의 영토를 회복하여 재정 적자를 면하고, 족벌주의를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우선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황령을 거의 자기 것으로 하고 있는 보르지아 가문의 영향력을 지워 없애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보르지아 가문 아래에서 핍박받고 있던 한때의 명문 귀족 집안인 오르시니 가문과 콜론나 가문과의 관계 정상화를 중개해, 교황청과 로마의 귀족들 간 관계를 개선하였다.
로마의 안전을 확실히 하기 위해, 교황은 파엔차나 리미니 등 소도시로부터 베네치아군을 내쫓았다. 1504년에는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왕국과 동맹을 맺어, 그들의 힘을 빌림으로써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이는 이탈리아의 독립성을 약화시키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당면책으로서는 최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 동맹도 결국 실제적인 영향력은 별로 없었으며, 로마냐 지방으로부터 얼마 안 떨어진 거리까지 베네치아군이 후최하는 것에 머물렀지만, 마침내 1506년에 교황 스스로가 군대를 인솔해 진격함으로써 페루자와 볼로냐 등을 함락시켜, 프랑스 왕국과 신성로마제국이 로마 교황청을 무시 못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는 것에 성공하였다. 당시 그는 갑옷으로 무장하고 직접 선봉에 서서 군대를 통솔하여, 전쟁터에서 무용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사람들에게 ‘무서운 사람(Il Terribile)’으로 알려졌다.
1506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12세 및 아라곤의 페르난도와 손을 잡고 대(對)베네치아 공화국 동맹을 결성, 1509년 초반에는 베네치아에 대한 파문과 수출입 금지령 등으로 베네치아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여 아냐넬로 회전에서 베네치아를 물리침으로써 베네치아의 이탈리아 반도에 있어서의 영향력을 한꺼번에 소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교황은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프랑스의 영향력의 크기가 커지는 것에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을 잡고, 프랑스 왕국에 적대했다.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을 이간질 시키려고 한 교황의 책략은 실패하였으며, 반대로 1510년 프랑스가 교회회의 소집으로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의 주교단은 교황에게의 충성을 거부하였고, 루이 12세는 교황의 폐위를 꾸몄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1511년에 피사 교회회의를 개회했다.
이에 교황은 베네치아 공화국, 아라곤 왕국으로 대(對)프랑스 동맹인 신성 동맹을 체결, 잉글랜드 왕국과 신성로마제국도 신성 동맹에 가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율리오 2세는 피사 교회회의를 반대하고, 1512년에 공의회를 소집했다(제5차 라테란 공의회). 그러다 마침내 프랑스군을 알프스 북부로 쫓아버리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역시 프랑스 이외의 강대국이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결과로 연결되었다. 로마를 포함한 교황령의 정치적 안정과 독립을 획득하였지만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독립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1513년 2월에 병에 걸려 몸져누운 뒤 선종하였다.
율리오 2세의 업적과 정책은 종교 지도자의 그것이라기 보다는 정치가 또는 군사적 지도자에 가까웠다. 이것은 알렉산데르 6세의 방침을 기본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스스로의 영예나 일족의 번영보다는 교회의 권위와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것에 전심했다는 것이다. 또 전임자의 성직매수와 족벌주의를 비난하였지만, 율리오 2세도 자신이 관련된 콘클라베에서 적어도 2번 정도 표의 매수 공작을 실시하거나 즉위 후 곧바로 3명의 조카와 사촌동생을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다만 이러한 행위는 오늘날에는 종교적 타락이 아니라, 교황의 군주적 측면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굴의 정신, 뛰어난 정치적 수완, 도덕적 중립성 등에 의해 동시대의 정치가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존재임에는 틀림없었다. 동시에 전쟁을 좋아하며 정치가스러운 인상을 풍기고는 있지만, 오늘날에도 인기가 있는 교황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율리오 2세에 대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그가 예술의 보호자였으며, 많은 예술가들을 원조했었다는 사실이다.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이 율리오 2세의 원조를 받아 뛰어난 창작 활동을 하였다. 교황은 예술을 숭상하여 자신의 재임 시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을 시작하여 그 대성당의 머릿돌을 놓았다. 미켈란젤로를 시켜 시스티나 성당에 벽화를 그리게 하고 로마를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미켈란젤로가 율리오 2세의 동상을 제작하면서 손에 성서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자, 성서 대신 칼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바꾸라고 명령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편집] 바깥고리
- Luminarium: Pope Julius II
- Pope Julius II at Find-A-Grave
- story about Pope Julius arguing with St.Peter trying to get himself into heaven - "Julius Excluded"
전 임 비오 3세 |
제216대 교황 1503년 10월 31일 - 1513년 2월 21일 |
후 임 레오 1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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