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 유럽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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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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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기를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에 꽂고 있는 소련군 병사. 1945년 4월 30일 베를린 공방전 중의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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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 |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핀란드 헝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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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알렉세이 안토노프 이반 코네프 |
페도르 폰 보크 에른스트 부쉬 |
동부 유럽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은 나치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이란 작전명으로 소련을 침공한 1941년 6월 22일 부터 1945년 5월 9일까지 중부 및 동부 유럽까지 포괄한 전선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모든 소비에트 연방 및 대부분의 러시아어 문서들에서는 이 전쟁을 대조국전쟁 (러시아어: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Velikaya Otechestvennaya Voyna)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전례없는 광포성, 파괴 그리고 엄청난 인명 손실로 악명이 높다. 몇몇 자료에서는 1939년 폴란드 침공도 포함시키곤 하지만, 이 기사에서는 두 주요 교전 당사자인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의 1941년 6월부터 1945년 5월까지 기간에 집중한다. 전쟁은 1945년 5월, 베를린 공방전을 마지막으로 독일이 항복하는 것으로 끝났고, 이후 소련이 군사 및 산업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련은 동유럽과 독일을 분할 점령했다.
러시아와 핀란드 간에 계속 전쟁은 동부 전선의 북부 전선에 포함된다. 일부 전쟁사가들은 러시아-독일 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소비에트-독일 전쟁, 독일-소비에트 전쟁이나 추축국-소비에트 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독소전쟁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목차 |
[편집] 개요
[편집] 교전 세력
이 전쟁은 1941년 6월 22일에 나치 독일이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깨고 국경을 넘어 소비에트 연방을 침략함으로써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전쟁은 독일군이 베를린 공방전 이후 소련에 1945년 5월 9일에 무조건 항복하여 끝났다(서방연합군에게는 1945년 5월 8일에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독일은 다른 추축국-주로 루마니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이탈리아-에 독일군을 전선 및 점령지구에서 지원할 인적 지원을 요구할 수 있었다. 최근에 소련과 한 차례 전쟁을 치른 반소적인 핀란드도 독일 편으로 전쟁에 가담했다. 독일은 또한 소련으로부터 고통을 겪은 우크라이나나 에스토니아 같은 곳에서는 반공산주의 빨치산의 지원을 받았다. 심지어 스페인 독재자 프랜시스코 프랑코가 보낸 스페인인 사단도 있었으며, 러시아 해방군같이 독일군이 고용한 많은 외국인부대도 있었다. 소련은 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의 여러 국강레서 파르티잔 지원을 받았으며, 소련의 지원으로 무장된 폴란드 1 군 및 2 군도 붉은군대와 함께 나란히 전선에서 싸웠다. 소련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는 주로 전쟁물자(4륜구동차, 트럭, 하프트랙, 전투기, 전차 등)를 지원받았다.
[편집] 이데올로기
히틀러는 그의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동부 유럽에서 독일인[1]을 위해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여 생활권(독일어: Lebensraum)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히틀러는 우랄 산맥 서쪽의 유럽 러시아에 주인 인종으로 독일인을 정착시키고, 러시아인 대부분을 시베리아로 추방하고 일부는 남겨서 노예 노동에 "사용"하려고 했다. 1930년대의 대숙청 이후, 히틀러는 소련이 군사적으로 약해져 정복의 기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상황과 독일이 군사적으로 불리해지면서 히틀러와 나치 선전가들은 전쟁을 거대한 "볼세비키 약탈자"들로부터 유럽 서구 문명을 방어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스탈린 또한 외국 점령을 꿈꾸었다: 세계의 관심이 서부 전선에 관심이 쏠려있는 1940년에 발틱3국을 합병했고, 히틀러 독일과 가능한 전쟁의 경우에 완충지대를 확보했다. 스탈린이 1939년 폴란드 분할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은 과소평가할 일은 아니었다. 아직 히틀러와 달리, 스탈린은 독일을 홀로 버려두고 동유럽을 포함하여 소련 영토를 확장시킬 광대한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며, 그래서 소련 정책은 히틀러가 공격해오기 전에 소련과 독일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드는 정도였을 것이다. 상당히 납득할만한 이유들을 소련은 가지고 있었다.
[편집] 결과
동부 전선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광대하고, 많은 피를 흘린 전역이었다. 대략 3천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값비싼 분쟁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른 전역들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동부 전선은 이데올로기적 논리로 전쟁을 규정하면서 압도적인 손실을 냈으며, 인간 생명을 경시하게 되는 결말을 빚었다. 베를린의 강경파 나치들에게 대소련 전쟁은 공산주의에 대한 파시즘 투쟁이었으며, 아리안 인종 대 하류 인종(독일어: Untermensch)인 슬라브 인종간의 투쟁이기도 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때부터, 히틀러는 "절멸 전쟁"으로 선포했다. 이데올로기 갈등이란 측면에서, 독일과 소련의 지도자 히틀러와 스탈린의 사고 방식이 전례없던 규모로 테러와 학살 규모를 키웠다. 히틀러는 슬라브 민족을 노예로 삼고, 동유럽에서 유대인들을 대량으로 쓸어버리고(홀로코스트) 싶어 했다.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생명을 경시했다. 여기에는 점령지 주민에 대한 탄압과 대량 이주 (독일의 경우는 계획적으로)가 포함되었다. 서부 전선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모든 이런 사실들은 전투원과 민간인 모두에게 매우 잔혹한 일이었다. 전쟁 말기, 동프로이센 등에서 독일 민간인들과 군인들이 필사적으로 서부로 탈출하려고 했고, 히틀러의 자살 이후 칼 되니츠가 서방 연합군에는 항복하면서도 소련과는 계속 싸우려고 시도했던 것도 이런 사정때문이었다.
동부 전선의 전쟁은 참전국들의 엄청난 민간인 사상과 고통을 주었다. 전선 후방에서 독일 점령지의 민간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포함한 잔혹행위는 일상사였다. 독일군 및 독일 동맹군들은 마을 주민 대량학살과 반복적인 민간인 인질 처형 등 민간인들을 극단적으로 잔혹하게 다루었다. 양측은 초토화 전술을 광범위하게 시행했지만, 독일의 경우 민간인 인명 손실은 소련보다는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다. 소련은 나치와 소련 자신(주로 NKVD(러시아어: 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внутренних дел, НКВД)에 의해 대략 2,000만명이 죽었다. 붉은군대가 1944년부터 독일을 침공했을때, 많은 독일 민간인들이 소련군 병사들의 복수심때문에 고통을 입었다(붉은군대의 잔학행위 참조). 전쟁 후, 연합군 사이에 맺어진 얄타 협정에 따라 동프로이센과 실레지아의 독일인은 오데르-나이세 선의 서쪽으로 추방되었고, 이는 세계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강제 이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동유럽에 흩어져 있던 소수 독일인들은 이렇게 추방되었고, 몰살당했다.
동부 전선의 전투 대부분은 인구 밀집 지역이나 그 근처에서 벌어졌고, 양측의 전투 행위 모두 대량 민간인 사상자를 내는데 일조했다.
[편집] 배경
[편집]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입니다.
1939년 8월에 체결된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은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규정한 비밀 협약이 있었다. 폴란드 침공 중에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침공하여 분할했으며, 1940년 6월 소련은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협박하여 루마니아와 발트 3국을 상대로 한 외교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발트 3국은 평화적으로 사실상("de facto") 소련에 점령되었고(서구 국가들은 합병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루마니아는 자국의 북부 및 북동 지역 영토(북부 부코비나와 베사라비아)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및 몰다비아에 반환했다.
[편집] 전쟁 결정
독일이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 및 발칸 반도를 정복하는 거의 2년 동안 양국 국경은 조용했다. 히틀러는 항상 소련과 조약을 파기하고 침공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1940년 봄에 그 결정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어리석게도 히틀러는 소련이 독일의 막강한 공세에 쉽게 항복할 것이며, 극심한 소련의 추위가 닥쳐오기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일과 전쟁에 두려움을 품고 있었거나, 독일이 2개 전선 전쟁을 시작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고, 히틀러를 도발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꺼렸다. 독일이 동부 폴란드에 대병력을 집결시키고, 국경을 넘어 은밀히 정찰 비행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스탈린은 국내외 첩보망들의 관련 보고들을 모두 무시했다. 더군다나 침략 당일 밤에도, 소련군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세미온 티모셍코 원수와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이 직접 서명한 명령을 받았다: "어떠한 도발에도 대응하지 마라" 및 "특별 명령없이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마라"였다. 그 결과, 스탈린이 정보기구들로부터 공격에 대한 세부 정보를 보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군 및 지휘부에는 완벽한 기습이었다. 가장 유명한 정보는 주일본 독일 대사관의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3월 15일에 6월 중순에 독일군이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보내왔고, 5월 15일에는 다시 날짜가 6월 22일로 잡혔다는 보고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 모든 것을 무시했다.
소련측 기록문서는 냉전 중에는 공개되지 않았고, 냉전 종식 이후 많은 문서가 공개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당수가 비공개 상태인 관계로, 당시 소련 지도부의 전쟁 전 결정들과 전략은 분명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편집] 경과
[편집] 1941년 여름 : 독일의 소련 침공
- 이 부분의 본문은 바르바로사 작전, 바일리스토크-민스크 전투입니다.
1941년 6월 22일 오전 4시 45분, 이탈리아, 루마니아 및 다른 동맹국 병사들이 포함된 300만명의 독일군이 국경선을 넘어 소련으로 쳐들어갔다. 한달간, 3방향으로 나뉘어진 공세는 전격전 전술 교리에 따라 전차부대가 돌격하는 동안 천천히 이동하던 보병 사단들이 포위망을 완성하여 수십만의 소련군 부대를 괴멸시켰다. 이 기간 동안 독일 공군(Luftwaffe)은 소련 공군기지들을 공격하여 소련군 전투기 및 폭격기들이 이륙도 하기 전에 지상에서 완전히 파괴하여 제공권을 장악했다. 몇 시간 만에 66개 공군 기지에서 최소 1,200여대가 파괴되었다.
3개 방면으로 갈라진 독일군 중 빌헬름 리터 폰 레브 원수가 지휘하는 북부집단군의 목표는 발트해 국가들을 거쳐 레닌그라드. 16군, 18군 및 4기갑집단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프스코프 및 노브고로드 등 러시아 도시를 휩쓸었다.
페도르 폰 보크 원수가 지휘하는 중부집단군은 2개 기갑집단(2 및 3 기갑집단)으로 구성되었고, 브레스트-리톱스크의 양쪽에서 동쪽으로 진격하여 민스크로 집중했다. 그들의 뒤를 2, 4, 9 군이 뒤따랐다. 민스크에서 합류한 독일군 기갑부대는 작전 개시 6일 동안 650km(400마일)을 질주하여 베레지나 강에 도착했다. 7월 11일에는 드니프로 강을 도하하여 다음 목표인 스몰렌스크로 진격했다. 독일군은 순조롭게 7월 16일에 스몰렌스크에 도착했지만,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9월 중순까지 스몰렌스크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1기갑집단, 6군, 11군, 17군으로 구성된 남부집단군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의 지휘에 따라 갈리치아를 지나 우크라이나로 진격하여 키예프에 집결한다는 작전 계획에 따라 진격하고 있었지만, 진격 속도는 다른 집단군에 비해 느렸다. 스탈린이 히틀러가 자원이 풍부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남부 지역을 노릴 것으로 생각하고 군대를 남부 지역에 집중 배치하는 바람에 남부집단군은 이들을 물리쳐야 했던 것이다. 7월 중순에 키예프를 향해 유일한 좁은 도로로 인해 진격 속도는 더디었다. 루마니아군 2개 군의 지원을 받은 11군은 베사라비아를 지나 오데사로 진격했고, 1기갑집단은 드니프로 강을 도하하여 키에프 동쪽까지 멀리 진격한 다음, 다시 키예프로 방향을 돌렸다. 1기갑집단과 키에프 남쪽에서 남부집단군의 다른 부대들이 우만에서 합류했고,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여 소련군 10만명을 포로로 잡았다.
소련에서는 전쟁 초기 패전 책임의 희생양을 찾고 있었다. 이미 6월 말에 소련군 서부 전선 사령관 디미트리 파블로프 장군이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쓰고 반역죄로 기소되어 총살당했다. 공군 서부 관구 사령관 코페츠 소장은 6월 22일 저녁에 이미 권총으로 자살했다.[2] 다른 한편으로, 붉은군대가 드니프르 강 및 드비나 강을 건너 후퇴함으로써, 소련 지도부는 지역 내 중공업 시설을 모두 해체한 다음 다시 싸서 열차편으로 가능한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중공업 시설은 우랄 산맥 넘어 중앙 아시아까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전하여 재조립 및 설치된 후 가동에 들어갔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기술자를 비롯한 민간인들도 해체된 공장 시설과 함께 이주 조치되었다. 그러나 민간인 대부분은 산업 시설과 함께 소개되지 못했고, 알아서 동쪽으로 피난을 가든가 침략군의 자비에 목숨을 맡겨야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파르티잔 부대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2,500,000만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동쪽으로 황급히 피난을 떠났다.[3]
스몰렌스크 점령과 루가 강 진격과 함께,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은 첫번째 주요 임무를 완료했다. 드비나 강과 브니프르 강 사이의 "육교"를 건너 장악하는 것이었다. 모스크바로 가는 400km의 길이 열렸다. 독일군 장군들은 즉시 모스크바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들의 주장을 묵살했고,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중공업 시설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소련군 예비대가 중부집단군 남쪽 측면과 수렁에 빠진 남부집단군 사이의 고멜에서 집결중인 것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중부집단군 소속의 하인츠 구데리안의 2기갑집단을 남쪽으로 돌려 키에프로 진격하도록 하라는 명령이 문제가 되었다. 장군들은 모스크바 점령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중부집단군에서 2기갑군이 빠지게 되면 모스크바 점령은 힘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구데리안 장군의 2기갑군과 역시 본래 중부집단군 소속인 폰 바이크스 대장이 지휘하는 2군이 중부집단군으로부터 차출되어 남부집단군에 임시로 배속되어 키에프 북쪽에서 키에프를 공략하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키에프 서쪽에서는 남부집단군 소속의 6군(발터 폰 라이네하우 원수)과 17군,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기갑대장의 1기갑군이 투입되었다. 독일군은 6개 기갑사단, 자동차화사단 5개, 보병사단 35개 사단 총 36여만여명이 투입되었고, 소련군은 5개군 35개 사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키에프 수비대 사령관은 스탈린의 신임이 두터운 세미욘 부데니 원수였다.
8월 25일, 키예프 공략전이 재개되었다. 구데리안의 2기갑군은 스몰렌스크와 키예프 중간의 포체프와 노브고로드를 점령한 후, 키에프 동쪽 롬나에 이르렀다. 남쪽에서는 클라이스트의 1기갑군이 드네프르 강을 도하한 후, 키에프 남동쪽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던 소련 38군을 격파하고 북쪽으로 진격했다. 9월 11일, 부데니 원수는 두 방면에서 독일군이 키에프를 포위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스탈린에 철수 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철수 허가 대신 부데니를 해임하고 키로포노스 대장을 새로운 사령관에 임명했다. 9월 14일, 키에프 수비대는 모스크바에 전선 유지 불가능을 보고했다. 한편 독일의 두 톱날은 9월 16일 키에프 동쪽 200km 지점인 로흐비차(Lokhvytsia)에서 합류했다. 9월 17일에 철수 명령이 내려졌으나 때는 이미 늦었고, 키에프 전투는 9월 26일에 끝났다. 독일은 총 665,000명의 소련군 포로와 대포 3,718문, 전차 886대를 노획했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인정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는 발표하지 않았다. [4]
모스크바 점령을 목표로 한 태풍 작전은 9월 30일에 시작되었다.
[편집] 1941년 가을 : 모스크바와 로스토프
- 이 부분의 본문은 태풍 작전, 레닌그라드 포위전, 세바스토폴 공방전입니다.
히틀러는 기갑집단의 이름을 기갑군으로 변경하고 모스크바 진격을 계속 하기로 결정했다. 히틀러는 9월 6일에 작전 개시 명령을 내렸고, 태풍 작전은 9월 30일부터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이 작전으로 2기갑군은 오렐(10월 7일 점령)에서 포장 도로를 따라 플라프스코예의 오카 강으로 진격하고, 그 동안 4기갑군(북부집단군에서 중부집단군으로 이동)과 3 기갑군은 뱌즈마(Viazma)와 브리얀스크(Bryansk)에서 소련군을 포위격멸하여 모스크바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한 채 레닌그라드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티흐빈(Tikhvin)에서 철도망을 차단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900일간 계속된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모스크바에 집중하면서 레닌그라드를 굶겨죽이기로 한 것이다. 레닌그라드를 지키기 위해 주코프가 새로운 사령관으로 취임했지만, 며칠 뒤에 다시 모스크바 방위전을 위해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북극권 북쪽에서, 독일과 핀란드 연합군은 무르만스크(Murmansk) 점령을 시도했지만, 리츠사 강보다 더 멀리 진격할 수 없었고, 진격은 돈좌되었다.
남부집단군은 드니프르 강에서 아조프 해로 진격하면서 하르코프, 쿠르스크와 스탈리노를 점령했다. 11군은 크림 반도로 전진했고, 가을에는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반도 전체를 장악했고, 세바스토폴은 1942년 7월 4일에 함락되었다. 11월 21일에 독일군은 카프카스로 향하는 길목인 로스토프를 점령했다. 그렇지만, 독일군 전선이 너무 확장되었고, 소련군 방어부대는 북쪽에서 독일 1기갑군에 반격하여 1기갑군을 미우스 강과 도시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전쟁 중 독일군의 첫번째 중요한 후퇴였다.
태풍 작전이 진행되던 중, 러시아의 날씨가 독일군을 때렸다. 10월 2주차에 비가 내렸고, 얼마 안되는 도로가 끊임없는 진흙탕으로 변하면서 독일군의 각종 차량, 말, 그리고 병사들을 움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모스크바까지는 여전히 160km 남은 상황에서, 기온이 급강하하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진흙이 얼면서 차량들은 다시 움직일 수 있었지만, 방한복을 미처 갖추지 못한 병사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5]. 전쟁이 몇 달 안에 끝날 것이라고 기대했던 독일군 지도부는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장비를 갖추는데 소홀했으며, 병사들은 이 시점까지도 여름 군복을 입고 있었다. 러시아의 동장군이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독일과 러시아 철도 시스템 사이에 궤도 폭이 달라 보급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0월 18일, 모스크바 북쪽 칼리닌(오늘날의 트베르)과 남쪽의 칼루가를 독일군이 점령하여 소련군을 포위할 움직임을 보였다. 주코프는 다시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날, 모스크바에서는 혁명 기념 행사가 열렸다. 전쟁 와중에 스탈린이 행사 강행을 결심한 것이다. 모스크바 방위를 위해 모스크바로 불려온 소련군 부대들은 갑자기 열병식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예년처럼 보병과 전차대가 모스크바 시내에서 열병식을 거행했다. 모스크바 시내를 행진한 소련군 부대들은 그대로 전선으로 향했다. 이때 스탈린의 연설은 어머니 러시아를 내세우며 민족주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땅이 얼어붙어 딱딱해지길 기다린 후, 모스크바 점령을 위한 마지막 공격이 11월 15일에 시작되었다. 11월 24일, 3기갑군과 4기갑군은 클린(Klin)을 점령했다. 11월 27일 4 기갑군은 크레믈린까지 30km(19마일) 지점까지 진격하여 힘키에서 모스크바 방어선까지 이르렀으나, 2 기갑군은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지막 도시인 툴라를 몇 차례 시도했지만 점령하지 못했다. 보르샤(Orsha, 러시아어: О?рша)에서 열린 프란츠 할더 장군과 3개 집단군 및 군 사령관 등 육군 참모본부(Oberkommando des Heeres]] 회의 이후, 모스크바로 계속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중부집단군 사령관 페도르 폰 보크 원수는 적군이 집결하여 더 강해질 동안 앉아서 기다리느니 계속 몰아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2월 6일, 독일 국방군(독일어: Wehrmacht)은 공격 기세를 계속 유지하며 모스크바를 점령하기에는 너무 전력이 약해진 것이 분명해졌다. 소련군의 주코프는 그가 계획한 반격 작전을 12월 5일부터 시작했다. 반격 작전의 주축은 일본이 중립이 확실시 되어 여유가 생긴 잘 훈련된 시베리아 방면군 예하 병력이었다.
이 시기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 태풍 작전
- 레닌그라드 포위전
- 로스토프 전투
- 세바스토폴 전투
- 키에프 전투
[편집] 1941년 겨울 : 소련의 반격
- 이 부분의 본문은 모스크바 전투, 2차 하르코프 전투입니다.
가을 동안 주코프는 시베리아와 극동 군관구의 싱싱하고 잘 무장된 병력을 모스크바로 이동시키는 일에 매달려 있었다. 이 부대들은 일본의 공격에 대비하여 주둔하고 있었는데, 스탈린의 첩보원 리하르트 조르게가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는 보고를 해옴에 따라 안심하고 병력을 모스크바로 돌린 것이다. 주코프의 계획은 전면적인 반격이 아니라 11월 초 전선으로 독일군을 몰아내어 모스크바의 위기 순간을 일단 면하는 것이었다.
1941년 12월 5일, 이 증원부대들이 T-34와 카츄사 로켓포의 지원을 받으며 모스크바를 둘러싼 독일군 전선을 공격했다. 독일은 소련에 예비대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새로운 소련군 부대들은 겨울 전투에 대비하여 준비했으며, 몇 개의 스키 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12월 13일에 모스크바 시민들은 모스크바의 위기가 해소되었다는 소식을 접했고, 12월 15일에는 클린이, 12월 말에는 칼루가가 해방되었고, 툴라의 포위도 풀렸다. 체력이 다하고 얼어붙은 독일군은 1942년 1월 7일에는 처음 지점에서 100km ~ 250km까지 밀려났다. 주코프는 이 정도에서 소련군을 재정비하고 방어선을 강화할 생각이었지만, 자신감을 회복한 스탈린이 1월 5일 전면적인 반격을 명령했다.[6]
레닌그라드의 포위망을 풀고 우크라이나의 공업 도시들을 탈환할 공세를 2월과 3월에 걸쳐 벌였지만 44만여명의 피해를 입고 모두 실패했다[7]. 아직 독일군은 막강했다. 셀링거 호(러시아어: Селигер)와 르제프 사이에 독일 북부집단군 및 중부집단군의 중간 지점에 철도역을 목표로 한 소련의 추가 공격이 1월말에 시작되어 양 집단군의 틈새로 진격했다. 칼루가에서 모스크바 남서쪽으로 진격하며 소련군의 2개 공세부대는 스몰렌스크로 모일 의도였지만, 독일군은 르제프 돌출부를 지키며 위치를 고수하며 싸웠다. 소련군 공수부대가 독일군이 점령한 도로고부시(러시아어: Дорогобуж)에 강하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살아남은 공수대원들은 독일군 전선의 후방에서 일어나고 있던 파르티잔 장악 지역으로 탈출했다. 북쪽에서, 소련군이 데미얀스크의 독일군을 포위했다. 데미얀스크의 독일군 수비대는 4달 동안 공중 보급으로 버텼다.
남쪽에서는 소련군이 이쥼(Izyum)에서 도네츠 강을 돌파하여 100km 종심으로 진격했다. 계획은 남부집단군을 아조프 해에 못박아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겨울이 끝나가면서 독일군은 반격할 수 있었고, 2차 하리코프 전투에서 지나치게 종심이 깊어진 소련군을 차단했다.
[편집] 1942년 여름 : 돈 강, 볼가 강, 카프카스
- 이 부분의 본문은 보로네시 전투 (1942년), 카프카스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입니다.
1942년 6월 28일 독일군의 작전 계획은 다시 모스크바를 공격을 상정하고 작성되었지만, 실제 공세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남부집단군은 보로네즈 전투에서 전선을 단단히 하고, 돈 강 남서 방향을 따라 진격하며 전황의 주도권을 잡았다. 거대한 계획이 우선 돈 강과 볼가 강을 장악한 다음, 카프카즈의 유전지대로 진격하는 것이었지만, 히틀러의 야망은 2가지 목표를 동시에 장악하는 것이었다. 로스토프는 1기갑군이 합류한 7월 24일에 다시 점령되었고, 그런 다음 마이코프(Maykop)를 목표로 남쪽으로 진격했다. 소련군은 다시 허둥지둥 후퇴하고 있었다. 이 작전의 일부로 샤믈리 작전이 실행되어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특수부대가 소련의 NKVD복장을 하고 침투하여 마이코프의 수비 병력을 약화시켜 큰 저항없이 1기갑군은 유전 생산지로 진격했다. 7월 29일, 스탈린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Ni Shagu Nazad!)라는 227호 명령을 내렸다[8].
반면에 막시밀리안 폰 바이크스의 B 집단군 예하 6군(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 지휘)은 1기갑군이 돈 강을 도하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전용된 4 기갑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고 있었다. 4기갑군이 스탈린그라드 공세에 합류할 즈음,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은 (바실리 추이코프 휘하의 62군으로 구성된) 보강되고 있었다. 독일군은 돈 강을 건너 볼가 강에 8월 23일에 도착했지만, 3달동안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시가전으로 치렀다.
남쪽을 향한 1기갑군은 카프카즈 구릉지대와 말카 강에 도착했다. 8월말, 루마니아군 산악부대가 카프카즈 첨병으로 합류했고, 루마니아 3군 및 4군이 아조프 연해를 청소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스탈린그라드로 향하는 독일군의 측면을 엄호하기 위해 재배치되었다. 트란실바니아를 둘러싸고 헝가리와 루마니아 간에 계속된 갈등을 염두에 두고, 돈 강 유역의 루마니아군은 헝가리 2군과 이탈리아 8군에 의해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하여 1기갑군 소속의 슬로바키아인 분견대와 6군에 소속된 크로아티아인 연대를 포함하여 모든 히틀러의 동맹군들이 이 지역에 집결했다.
[편집] 1942년 겨울 : 스탈린그라드
- 이 부분의 본문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천왕성 작전입니다.
독일 6 군과 4 기갑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전투를 치르는 동안 소련군은 도시 양쪽의 돈 강 교두보에 집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1942년 11월 19일 공격을 시작했다. 천왕성 작전에서 2개 소련 전선군이 루마니아군에 강타를 가해 전선을 돌파하여 11월 23일 칼라치로 집결했다. 니콜라이 바투틴의 남서전선군은 남쪽에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돈 전선군은 북쪽에서 돌파했다. 루마니아군 27,000여명이 소련의 포로가 되었고, 스탈린그라드에 추축군 30만명(6군, 4기갑군 일부, 헝가리군과 이탈리아군 일부)을 포위했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과 독일군 전선 간에는 160km(100마일) 가량의 간격이 생겨버렸다. 동시에 시작된 르제프 지역의 공세 작전인 화성 작전은 스몰렌스크 해방을 목표로 전개되었지만, 독일군의 전술적 능력에 가로막혀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를 구원한다는 절망적인 시도를 벌여 헤르만 호트 대장이 이끄는 4기갑군이 스탈린그라드로 달렸지만, 12월 12일에 진격이 막혔고, 그 시점에서 스탈린그라드라는 솥(Kessel)[9]에 갇힌 6군은 굶주리고 너무나 약해져서 스스로 포위망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3개 기갑사단으로 시작된 겨울 폭풍 작전은 코텐르니코보(Kotelnikovo)에서 악사이 강(Aksai river)으로 진격했지만, 목표 지점에서 65km를 남겨두고 돈좌되었다. 구출 작전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군은 이탈리아군을 때려부수기로 했고, 12월 16일에 시작된 독일 4기갑군의 구출작전을 좌절시켰다. 만슈타인의 구원군은 12월 24일에 진격을 멈출 수 밖에 없었고, 스탈린그라드의 파울루스 장군과 6군은 포위망에 갇힌 채 홀로 싸우게 되었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주변에 60개 사단을 배치하여 독일군을 압박했다. 1941년에 데미얀스크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던 공중 보급도 이번에는 실패로 돌아갔고, 전쟁 초반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가 새로운 전투기로 부활한 소련 공군과 스탈린그라드 주변에 배치된 대공화망, 그리고 악천후로 인하여 독일 공군의 공중보급 작전은 수송기 488대 추락과 승무원 1000여명 사망이라는 피해만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갔다. 괴링은 하루 500톤의 물자 보급을 장담했지만, 평균 100톤 미만이었고, 12월과 1월에는 그나마 100톤도 보급할 수가 없었다[10]. 한편, 상당히 제한된 규모의 소련군 반격은 로스토프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상황을 살펴본 후, 독일 A 집단군이 카프카즈와 돈 강에서 빠져나가 철수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943년 1월 17일, 독일군 고립 지대는 원래 크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1월 26일에는 스탈린그라드를 그 전해부터 지키며 독일군과 치열하게 싸워왔던 추이코프의 62군과 외부에서 포위망을 좁혀들어오던 소련군이 만났다. 1월 31일, 6군 30만 명 중 생존자 9만여명이 항복했다. 그 시점에 헝가리 2군도 전멸했다. 도시 북부에서는 2월 2일까지 산발적인 저항이 계속되었다. 소련군은 돈 강으로부터 스탈린그라드 서쪽 500km까지 진격하여 쿠르스크(1943년 2월 8일 탈환)와 하리코프(1943년 2월 16일 탈환)에 이르렀다. 남쪽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르제프 돌출부를 포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덕분에 독일군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반격을 성공시킬 수 있을만큼 자유로워졌다. 티이거 전차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무장친위대 기갑군단으로 강화된 만슈타인의 반격은 1943년 2월 20일에 시작되어 폴타바부터 싸우기 시작하여 봄이 되어 눈이 녹기 시작한 3월 3주째에 3차 하리코프 전투를 치렀다. 이 작전으로 전선 중앙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폭 192km(120마일), 길이 96km(60마일) 규모로 독일군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소련군의 돌출부가 형성되었다.
이 시기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 스탈린그라드 전투
- 천왕성 작전
- 화성 작전
- 겨울 폭풍 작전
- 토성 작전
[편집] 1943년 여름 : 쿠르스크
- 이 부분의 본문은 쿠르스크 전투입니다.
1943년 3월, 얼음이 녹고 비가 내리자 전선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고, 양측은 이 틈을 이용해 1943년의 전략 수립에 골몰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1943년 3월에 벌어진 3차 하리코프 전투에서 보여준 독일군의 능력은 아직 봄과 여름은 독일군의 계절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따라서 독일과 소련은 1943년 여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은 대대적인 개혁과 원조 물자에 힘입어 현대적인 군대로 탈바꿈하면서 독일군과 대등한 전력으로 성장하면서 격차는 좁혀지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점령 실패 후, 히틀러는 다가오는 전투 시즌에 대비한 작전 계획 수립을 독일군 최고사령부에 위임했고, 모스크바 공략전 실패 책임을 물어 해임했던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을 기갑총감으로 복직시켰다. 기갑총감은 직접 전선에서 기갑부대를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위한 전차의 생산 및 배치, 기타 기갑부대 운용과 관련한 모든 것을 감독하는 자리였다. 참모들간 논의는 소련군의 쿠르스크 돌출부를 제거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히틀러의 신경질에도 불구하고 한 방향으로 통일되었다. 히틀러는 소련군이 대전차포, 대전차 참호, 지뢰, 철조망, 참호, 토치카, 대포 및 박격포 등으로 쿠르스크의 방어 진지를 강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전격전이 개시되면, 소련군은 쉽게 무너질 것이고, 그 후 서부전선으로 연합군의 위협으로 주의를 돌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쿠르스크 전투의 작전 계획은 폰 만슈타인 원수가 "성채"(Zitadelle)라는 암호명으로 세웠다. 진격은 쿠르스크 북쪽 오렐 돌출부와 남쪽 벨고로드에서 시작될 것이었다. 작전 계획은 쿠르스크 돌출부를 남쪽과 북쪽에서 2개 기갑군을 날카로운 칼날삼아 우회 및 포위하여 남부집단군이 1941년~1942년 겨울 동안의 전선을 회복하여 소련군 주력을 제거하고, 더 나아가 남부 러시아를 재점령하거나 모스크바를 향해 북동쪽으로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1941년과 1942년 여름 동안 소련의 예비 인적 자원이 고갈되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소련은 여전히 재정비 중이었고, 아직 독일이 점령하지 못한 지역에서 병력을 충원하여 이동시키고 있었다[11]
군정보부(Abwehr)의 소련군 방어진지에 대한 정보 수집은 스타브카가 지휘하고 스위스에 거점을 둔 루시 첩보망이 벌인 역정보전과 가짜 정보에 휘말려 알아낸 것이 적었지만, 장군들의 압력으로 히틀러도 쿠르스크 돌출부에 대한 공격에 동의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새로운 전차인 판터와 티이거를 비롯한 신장비가 어느 정도 생산될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본래 만슈타인은 4~5월로 작전 개시 예정일을 잡았지만, 히틀러의 고집으로 작전 개시일은 자꾸 지연되었다. 독일군은 병력 900,000명, 전차 2,700대, 비행기 2,000대, 대포 10,000문이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1941년과 1942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독일군이 어느 방향에서 공세를 시작할 지를 신중히 판단했다. 주코프를 비롯한 소련군 참모부는 가능한 정보를 모두 수집했고, 오렐과 볼고로드에 독일군이 집결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쿠르스크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들은 2년 간 독일과 전투 경험을 통해 독일군이 이번에도 두 갈래로 갈라져 자신들을 포위하려 들 것이라고 짐작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이지만, 그들의 판단은 옳았고 독일이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소련군도 이에 맞서서 종심이 아주 깊은 견고한 대전차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스탈린도 이번에는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지 않고 장군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12].
돌출부 북쪽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장군의 중앙 전선군이 담당했고, 남쪽은 니콜라이 바투틴 장군의 보로네즈 전선군이 맡았다. 그들의 뒤에는 예비대로 브리얀스크 전선군과 남서부 전선군이 증강되었고, 전선 150마일 뒤에 이반 코네프 장군의 스텝 전선군이 대기했다. 소련군의 총 병력은 병력 1,336,000명, 전차 3,444대, 항공기 2,900대, 대포 19,000문으로 증강되었다. 소련군에게 다행인 것은 독일측의 공격 계획과 관련한 정보가 계속 들어오는 것이었다. 다만 언제 공격이 정확하게 시작될 지는 한동안 불분명했다. 루시 첩보망이 계속 정보를 보내왔지만, 독일도 가짜 정보를 흘려보내곤 했다. 스위스 뿐만 아니라 영국 내 공산주의자 조직도 관련 정보를 보내왔다. 소련군 지휘부는 독일군의 공격 날짜를 알 수 없어서 계속 초조해 했다. 결정적 정보는 6월 말에 소련군 정찰대가 붙잡은 독일군 포로들에게서 나왔다. 그들을 통해 독일군이 전투 배치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7월 2일에 소련군은 1급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7월 4일, 돌출부 남쪽에서 붙잡힌 독일군 병사가 공격이 다음날 새벽 3시라고 실토했다. 주코프는 독일의 공격 예정시간보다 30분 빠른 02시 30분에 선제 공격을 명령했고, 소련군 포병대가 독일군보다 먼저 포격을 시작했다. 쿠르스크 전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편집] 1944년 여름
주요 기사: 크림 전투 (1944년), 벨로루시 공세, 리우브-산도메쉬 공세(Lvov-Sandomir), 바르샤바 봉기, 슬로박 민족 봉기, 루마니아 전투 (1944년), 데브레첸 전투
독일은 소련이 남쪽에서 다시 공격을 재개할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그 전선은 리비우(Lvov)로부터 15마일 떨어져 있었고, 베를린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진격로였다. 따라서 독일 중부집단군은 벌거벗겼졌고, 그들의 방어선은 소련쪽으로 여전히 돌출되어 있었다. 벨라루스 공세(암호명 바그라치온 작전)가 1944년 6월 22일 시작되었다. 이 작전은 4개군 120개 사단으로 종심이 얇은 독일군 방어선으로 쇄도하는 소련군의 대규모 공격 작전으로, 소련군은 독일군이 예상한 북부집단군이 아니라 중부집단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독일은 2주 전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서유럽이 급박해지자 급히 일부 병력을 프랑스로 이동시킨 상태였다. 소련군은 적군에 대해 전차 비율은 10:1, 항공기는 7:1이라는 전력을 보유했다. 공격 시점에서 소련의 양적 질적 우위는 압도적이었다. 230만 명 이상의 소련군이 겨우 80만명도 되지 않는 독일 중부집단군을 상대로 한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는 7월 3일에 되찾았고 독일군 50,000여명을 붙잡았다. 10일 후, 소련군은 전쟁 전 폴란드 국경에 도착했다. 소련군이 너무 빠른 속도로 진격하는 바람에 쿠어란트에서 싸우고 있던 독일 북부집단군을 차단하여 고립시켰다. "Bagration"은 전쟁 중 가장 큰 단일 작전의 하나였다. 1944년 8월말, 붉은군대는 전사, 실종, 부상, 질병 등으로 765,815명을 잃었으며, 전차 및 돌격포는 2,957대를 잃었다. 독일은 대략 670,000 여명을 전사, 실종, 부상, 질병으로 잃었으며, 그 중 160,000여명은 포로가 되었다.
인접한 리비우-산도메쉬 공세(Lvov-Sandomir)는 1944년 7월 17일에 시작되어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을 빠른 속도로 몰아냈다. 남부 전선에서 소련은 루마니아까지 진격했으며, 루마니아의 추축동맹 정부에 대한 쿠테타가 8월 23일에 일어났으며, 소련군은 부카레스트를 8월 31일에 점령했다.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루마니아와 소비에트 연방은 사실상 모스크바가 구술한 내용으로 정전협정을 맺었다. 루마니아의 항복은 발칸 반도 전체를 독일이 잃는 결과를 낳아 남부 전선에 큰 공백을 가져왔다.
폴란드에서는 소련군이 접근함에 따라 폴란드 시민군이 템페스트 작전을 개시했다. 바르샤바 봉기 중에 소련군은 비스툴라 강에 멈춰 있었고, 폴란드 저항운동을 도와줄 수 없었거나 그럴 의지가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폴란드 1군의 바르샤바를 구원하려던 시도는 소련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9월에 큰 손실을 입고 물러났다.
1944년 8월부터 10월까지 슬로바키아에서는 슬로바크 민족 봉기가 시작되어 독일군과 반란을 일으킨 슬로바크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반슈카 비슈트리카(Banska Bystrica)에서 주로 벌어졌다.
[편집] 1944년 가을
- 이 부분의 본문은 발틱 공세, 부다페스트 공세입니다.
1944년 9월 8일, 붉은군대는 전쟁 전 슬로바키아-폴란드 국경에 위치한 두클라 통로(Dukla Pass)로 공격을 시작했다. 2달 후, 러시아군은 전투에 승리했고, 슬로바키아로 진입했다. 피해는 컸다. 소련군은 85,000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여기에 수천명의 독일군, 슬로바키아인, 체코인이 사망했다.
[편집] 1945년 8월 : 만주 및 대일본전
- 이 부분의 본문은 8월 폭풍 작전입니다.
소련의 일본 괴뢰 정부인 만주국 침공은 1945년 8월 8일에 시작었다. 소련군은 멍장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 남부 사할린, 한반도 북부 및 쿠릴 열도로 진격했다. 소련의 일본 제국에 대한 최초이자 유일한 군사 작전이었다. 얄타 회담에서, 일본과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후 3개월 내에 태평양 전선에 참전해달라는 서방 연합국의 요청에 응한 것이었다.
[편집] 공업 생산
소련의 승리는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경제를 능가한 소련의 공업 생산 능력이 기여한 바도 컸다(물론 전쟁의 승패는 여러 가지 요인이 결정한다). 스탈린이 1930년대에 추진한 5개년 계획은 우랄 산맥과 중앙 아시아 지역의 산업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1941년, 전선으로 병력을 수송한 기차들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로부터 수천 개의 공장을 해체하여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지역으로 수송하는데 사용되었다.
소련의 인적 자원이 1943년부터 점점 고갈 상태가 되어가자, 소련의 대규모 공세는 점점 기계 장비인 전차와 대포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13]. 전쟁 물자 생산량의 증대는 민간 생활 수준의 희생-총력전 개념의 가장 철저한 응용-으로 얻어졌고,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전시 물자 대여 및 원조도 기여했다.[14] 반대편인 독일은 정복 국가와 소련 전쟁포로들 중에서 차출한 대규모 노예 노동에 의존할 수 있었다.
독일의 기초 자원 생산은 소련보다 많았고, 노동력도 소련보다 많았으나 소련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소련의 차량들은 생산 비용 및 유지/보수 비용이 낮은 반면에 독일은 생산 비용 및 유지/보수 비용이 높았다.
독일은 생산 비용이 비싸고, 복잡한 차량 생산을 선택했고, 소련의 생산량을 따라갈 수 없었다. 1943년에 소련이 전차 24,089대를 생산한 반면, 동시기 독일은 독일은 19,800대를 생산했다. 소련은 기존 설계를 변경하고 단순화하거나 생산 공정을 개선하여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반면 독일 산업은 판터나 킹타이거, 엘레판트 구축전차 같은 중후 장대한 보다 진보했지만 설계는 복잡한 기갑차량 개발을 독려받았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영국 공군과 미국 8 육군 항공대의 밤낮없이 계속되는 전략 폭격에 대응하기 위해 상당한 양의 자원을 대공포 및 전투기 생산에 돌려야 했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절대적인 비교는 하기는 힘든 상황이며, 이러한 당시 독일의 기갑 차량 생산 체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연도 | 석탄 (단위:백만톤) | 강철 (단위:백만톤) | 알루미늄 (천톤) | 석유 (단위:백만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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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 소련 | 독일 | 소련 | 독일 | 소련 | 독일 | 소련 | 이탈리아 | 헝가리 | 루마니아 | 일본 | |
1941년 | 315.5 | 151.4 | 28.2 | 17.9 | 233.6 | ? | 5.7 | 33.0 | 0.12 | 0.4 | 5.5 | - |
1942년 | 317.9 | 75.5 | 28.7 | 8.1 | 264.0 | 51.7 | 6.6 | 22.0 | 0.01 | 0.7 | 5.7 | 1.8 |
1943년 | 340.4 | 93.1 | 30.6 | 8.5 | 250.0 | 62.3 | 7.6 | 18.0 | 0.01 | 0.8 | 5.3 | 2.3 |
1944년 | 347.6 | 121.5 | 25.8 | 10.9 | 245.3 | 82.7 | 5.5 | 18.2 | - | 1 | 3.5 | 1 |
1945년2 | ? | 149.3 | ? | 12.3 | ? | 86.3 | 1.3 | 19.4 | - | - | - | 0.1 |
연도 | 전차 및 자주포 | ||||
---|---|---|---|---|---|
소련 | 독일 | 이탈리아 | 헝가리 | 일본 | |
1941년 | 6,590 | 5,200[17] | 595 | - | 595 |
1942년 | 24,446 | 9,300[18] | 1,252 | 500 | 557 |
1943년 | 24,089 | 19,800 | 336 | 558 | |
1944년 | 28,963 | 27,300 | - | 353 | |
1945년[19] | 15,400 | ? | - | - | 137 |
연도 | 항공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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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 독일 | 이탈리아 | 헝가리 | 루마니아 | 일본 | |
1941년 | 15,735 | 11,776 | 3,503 | - | 1,000 | 5,088 |
1942년 | 25,436 | 15,556 | 2,818 | 6 | 8,861 | |
1943년 | 34,845 | 25,527 | 967 | 267 | 16,693 | |
1944년 | 40,246 | 39,807 | - | 773 | 28,180 | |
1945년2 | 20,052 | 7,544 | - | - | 8,263 |
연도 | 산업 노동자 | 외국인 노동자 | 총 노동자 | |||
---|---|---|---|---|---|---|
소련 | 독일 | 소련 | 독일 | 소련 총계 | 독일 총계 | |
1941년 | 11,000,000명 | 12,900,000명 | - | 3,500,000명 | 11,000,000명 | 16,400,000명 |
1942년 | 7,200,000명 | 11,600,000명 | 50,000명 | 4,600,000명 | 7,250,000명 | 16,200,000명 |
1943년 | 7,500,000명 | 11,100,000명 | 200,000명 | 5,700,000명 | 7,700,000명 | 16,800,000명 |
1944년 | 8,200,000명 | 10,400,000명 | 800,000명 | 7,600,000명 | 9,000,000명 | 18,000,000 |
1945년[22] | 9,500,000명 | ? | 2,900,000명 | - | 12,400,000명 | - |
추축 동맹국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및 불가리아도 독일의 숫자에 포함되어 있다. 군사 물자 생산에 필요한 독일의 철광석 2/3는 스웨덴에서 수입한 것이엇다. 소련의 생산력은 미국과 영국의 전시 물자 대여 및 원조 계획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스탈린그라드 패배 후, 요제프 괴벨스가 스포츠궁전 연설에서 명확히 제시한 것처럼, 독일은 전시 경제로 완전히 돌입했고, 알베르트 슈페어의 헌신적인 지도로 연합군의 계속되는 폭격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에는 생산량이 증대되었다
[편집] 피해
동부 전선은 격렬함, 광포함, 잔인성에서 어떤 전쟁과도 견줄 바가 없었다. 수백만의 독일군과 소련군이 광범위한 전선에서 전투를 치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단일 전선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추축군 500만명이 전사했으며, 소련군은 1060만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포로 생활 중 260만명의 소련 병사가 죽었다. 소련의 민간인 피해는 1400만 ~ 1700만명에 달했다. 소비에트와 러시아 역사가들은 소위 되돌릴 수 없는 피해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대략 피해는 몇 가지 요소에 기인한 것이다. 전쟁 포로와 파르티잔에 대한 가혹하고 잔인한 처리, 독일과 소련 양측의 서로 상대방 민간인들에 대한 복합적인 잔학 행위, 전선에서 양측의 병사들이 상호 절멸을 목적으로 한 전선 병사들 간에 격렬한 전투 등 때문이었다. 전투와 초토화 작전 전술 사용은 농경지, 각종 사회 생활 인프라(수도, 도로와 같은) 및 마을 등을 파괴하여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했다.
추축군 | ||||
---|---|---|---|---|
총 사상 | 전사/실종 | 소련군측 독일군 포로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 |
독일 | 4,300,000명 | 3,100,000명 | 3,300,000명 | 474,967 ~ 1,200,000명 |
독일군에 가담한 소련인 | 215,000명+ | 215,000명 | 1,000,000명 | 알려지지 않았음. |
루마니아 | 281,000명 | 81,000명 | 500,000명 | 200,000명 |
헝가리 | 300,000명 | 100,000명 | 500,000명 | 200,000명 |
이탈리아 | 82,000명 | 32,000명 | 70,000명 | 50,000명 |
총계 | 5,178,000명 + | 3,528,000명 | 5,450,000명 | 1,650,000명 |
소련군 | ||||
---|---|---|---|---|
총 피해 | 전사 및 실종 | 추축군 포로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 |
소비에트 연방 | 10,600,000명 | 7,600,000명 | 5,200,000명 | 2,600,000명 |
폴란드 | 24,000명 | 24,000명 | 알려지지 않음 | 알려지지 않음 |
루마니아 | 17,000 | 17,000명 | 80,000명 | 알려지지 않음 |
불가리아 | 10,000명 | 10,000명 | 알려지지 않음 | 알려지지 않음 |
총계 | 10,651,000명 | 7,651,000명 | 5,280,000명 | 2,600,000명 |
소련의 전체 손실은 파르티잔 25만여명과 민병 15만여명이 포함된 수치다. 폴란드 동부에서 소련의 다른 지역으로 탈출한 폴란드인들로 편성된 소련군 소속의 폴란드군은 1943년부터 소련군 측에서 전투에 참가했으며, 나치 치하의 폴란드 영토들이 1944년에서 1945년 사이에 해방되면서 규모가 늘어났다.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때, 그들은 편을 바꾸어 독일에 선전포고할 것을 강요받았다. 불가리아, 루마니아, 핀란드가 그런 경우였다.
소련 시민 중 일부는 독일을 편들어 안드레이 블로소프 장군의 러시아 해방군(Russian Liberation Army, ROA, 러시아어: Русская Освободительная Армия, РОА)에 가담했다. 러시아 해방군에 가담한 대부분은 공산주의를 증오하고 나치를 공산주의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보았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동부 전선에서 싸웠지만, 일부는 노르망디 해안으로 배치되었다. 히틀러의 대서양 방벽 건설에 동원된 경우도 있고, 병력 부족을 메꾸기 위해 배치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사정을 모른 채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들은 여우굴에서 "Russki!"라고 외치며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놀랐었다. 독일군에 가담한 다른 집단은 1940년에 강제 병합된 발틱 국가 출신들이나 우크라이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무장친위대 소속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전투에 참가했다.
[편집] 주요 전투
- 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 모스크바 공방전 (1941년)
- 스탈린그라드 전투 / 우라노스 작전 (스탈린그라드 포위를 풀기 위한 소련군의 반격 작전) (1941년 ~ 1942년)
- 레닌그라드 포위전 (1941년 ~ 1944년)
- 쿠르스크 전투 (1943년)
- 세바스토폴 공방전 (1942년)
- 느시 사냥 작전 (1942년)
- 바그라티온 공세 (1944년, 소련군 공세 작전)
- 하르코프 1차 공방전 (1941년)
- 하르코프 2차 공방전 (1942년)
- 베를린 공방전
[편집] 더 읽어보기
- en:Timeline of the WWII Eastern Front.
- en:Military history of Germany during World War II.
- en:Operation Silberfuchs, Axis attack on the Soviet Arctic.
- en:Operation August Storm :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후 만주 침공전
- en:Historiography of World War II.
- en:Captured German equipment in Soviet use in Eastern front
- en:Italian war in Soviet Union, 1941-1943
- The Italian Alpini infantry corps in Russia
- en:Women in the Russian and Soviet military
[편집] 각주 및 참고 문헌
[편집] 참고 문헌
- 다음은 영어판의 참고 문헌이다.
- 덩칸 앤더슨 및 다른 사람들The Eastern Front: From Barbarossa to Berlin the Campaigns of World War II, Zenith, 2001, ISBN 0-7603-0923-X
- 앤토니 비버(Antony Beevor), & Artemis Cooper, Stalingrad, Viking, 1998.
- 앤토니 비버, Berlin: The Downfall 1945, Penguin, 2002.
- 존 에릭슨(John Erickson), The Road to Stalingrad, Harper & Row, 1975.
- 존 에릭슨, The Road to Berlin, Harper & Row, 1982.
- 존 에릭슨과 데이빗 딜크스(David Dilks), Barbarossa, the Axis and the Allies,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94.
- 데이빗 글란츠(David Glantz)와 조너던 하우스(Jonathan House), 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5.
-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기갑 지휘관》, Da Capo Press, New York, 2001.
- 리델 하트(Basil Liddell Hart),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Cassel & Co; Pan Books, 1973.
- 데이빗 어빙(David Irving), Hitler's War, Hodder & Stoughton, 1977.
- Rolf-Dieter Muller and Gerd R. Ueberschar. Hitler's War in the East, 1941-1945: A Critical Assessment (1997)
- 루디거 오버만스(Rudiger Overmans) Deutsche militarische Verluste im Zweiten Weltkrieg
- 리처드 오버리(Richard Overy), Russia's War: A History of the Soviet Effort: 1941–1945, Penguin, 1997.
- 앨버트 시턴(Albert Seaton), The Russo-German War 1941–45, Praeger, 1971.
- F. W. 윈터보텀(F. W. Winterbotham), The Ultra Secret, Orion, 1974.
- 한국어판을 위해 다음 문헌을 추가로 참조했다.
-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저, 류한수 옮김, (서울, 2003년, 도서출판 지식의풍경) - 이 책은 영어판에서도 참고한 책이다. 원제는 Russia's War: A History of the Soviet Effort: 1941–1945이다.
[편집] 각주
- ^ German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독일인으로 좁혀서 번역할 수도 있지만, 게르만족으로 독일인을 포함한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던 히틀러가 동유럽을 침략할 의사를 이미 1925년에 당당히 밝혔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리처드 오버리, 119쪽.
- ^ 리처드 오버리, 111쪽. Kopets는 일부 자료에선 23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 ^ 스탈린이 6월에 독일이 침략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도 이때문이었다
- ^ 〈밀리터리 리뷰〉, 2006년 5월 호
- ^ 리처드 오버리, 171~172쪽
- ^ 리처드 오버리, 173쪽
- ^ 리처드 오버리, 220쪽. 227호 명령은 당시 모든 소련군 부대에 배포되었지만, 전쟁 후에는 모든 세부 내용의 공개가 금지되었다. 1988년에 가서야 내용이 다시 공개되었다.
- ^ 당시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이렇게 불렀다. 리처드 오버리, 238쪽.
- ^ 리처드 오버리, 251쪽
- ^ 그러나 소련도 병력 자원이 마냥 무한대인 것은 아니어서 전쟁 말기에 이르르면 각 사단의 실제 병력은 정원의 60 ~ 70%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병력 부족에 시달렸고, 모자란 병력을 전차와 대포의 화력으로 메꾸었다.
- ^ 오버리, 273쪽
- ^ 이때의 경험으로 구 소련은 전후에 세계 최초로 보병전투차(Infantry Fighting Viecle)인 BMP-1을 개발했으며, 독일 역시 마더 보병전투차를 개발했다.
- ^ 전차나 전투기 등의 원조도 있었지만, 열차, 4륜구동, 트럭, 반궤도 차량 등의 지원도 많았다. 소련이 전차 생산에 집중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로 전차 외의 차량을 미국이 원조해준 것을 꼽는 경우도 있다.
- ^ 통계는 리처드 오버리의 Russia's War(한국어판 제목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 155 및 Campaigns of World War II Day By Day, 크리스 비숍과 크리스 맥크냅 공저, pp. 244-52.
- ^ 1945년 통계는 명확한 수치가 없다. 소련측의 1945년 통계는 전쟁이 끝난 후까지 포함한 1945년 전체의 것이다.
- ^ 1941년에서 1942년까지 독일측 통계는 전차만 포함되어 있다. 돌격포 같은 자주포는 회전식 포탑이 없었기 때문에 전차에 비해 생산비용이 2/3 수준이었다(4호 전차의 경우 대당 단가가 10만 마르크였지만, 4호 돌격포는 8만 5천 마르크 정도였다). 이들 자주포들은 방어임무에 더 적합했다. 그런 덕분에 독일은 전쟁 후반기에는 이러한 종류의 자주포 생산에 더 호의적이었다.
- ^ 통계 수치는, The Dictators: Hitler's Germany, Stalin's Russia by Richard Overy p. 498.의 것임.
- ^ 뤼디거 오버마스, Deutsche militarische Verluste im Zweiten Weltkrieg. Oldenbourg 2000. ISBN 3-486-56531-1
- ^ 바딤 에리크만, Poteri narodonaseleniia v XX veke: spravochnik. Moscow 2004. ISBN 5-93165-107-1; Mark Axworthy, Third Axis Fourth Ally. Arms and Armour 1995, p. 216. ISBN 1-85409-267-7
[편집] 외부 참고 웹사이트
- 리처드 오버리 교수가 BBC를 위해 쓴 동부 저선에 대한 요약글
- 러시아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들 기념회(영어 및 러시아어)
- 동부전선 관련 지도
- d.R 빌헬름 라트코프스키 중위에 대한 회상 1940년 ~ 1945년 (동부 및 서부 전선에서 싸운 독일군인)
- 동부 전선 관련 사진, 비디오, 인터뷰, 회상록 등
- Feldgrau.com 1919년 ~ 1945년까지 독일군 소개 사이트
- 1943년 9월까지 동부 전선에 대한 정보
- "보로둘린 콜렉션" : 전쟁 관련 사진 모음
- ((러시아어)) Duel.ru Владимир Литвиненко. Были ли потери Красной Армии в Великой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е чрезмерными?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역 및 전선 |
유럽 전선 |
폴란드 | 가짜 전쟁 | 덴마크와 노르웨이 | 프랑스 및 베네룩스 | 영국 |
동부 전선 1941년 ~ 1945년 | 계속 전쟁 | 서부 전선 1944년 ~ 1945년 |
아시아 및 태평양 전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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