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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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기(文明琦, 일본어: 文明琦一郞, 1878년 6월 18일 ~ 1968년 8월 15일)는 일제 강점기의 친일 인물이다.
평안남도 안주 출생이다. 어린 시절 경상북도 영천에 정착하였고, 경북 지역을 생활 터전으로 삼았다.
그는 영천과 영덕에서 영세한 사업을 운영하다가 점차 자본을 모아 1907년 제지 공장을 열고 제지업에 뛰어들었다. 중국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이 즈음부터 일제와 밀착하여 사업 확대에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고, 문명기는 제지업과 수산업을 함께 운영하면서 금광에도 투자하여 성공함으로써 도내에서 알아주는 큰 부호가 되었다.
관선 도의회 의원 등을 지내면서 지방의 유지로 활동하던 문명기는 1935년 비행기 구입을 위한 거액의 국방헌금을 기부하였는데, 일제가 이를 독지가가 보내온 '애국의 지성(愛國의 至誠)'이라며 크게 보도하고 헌납식까지 열면서 선전함으로써 그도 전국적인 친일파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문명기가 기증한 비행기에는 '문명기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는 이때 이미 자살 폭격을 옹호하는 선구적인 친일 활동을 했고,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조직하여 비행기 헌납 운동을 벌였으며, 여러 곳에 강연을 다니며 침략 전쟁을 지원할 것을 역설하거나 중국 전선의 부대를 방문하여 군인들을 위문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국방비를 거듭 헌납하고 의용단 모집에 앞장섰으며, 1943년에는 비행기 뿐 아니라 배를 기부하자는 헌함(獻艦) 운동을 벌이고 솔선수범하며 광산을 기증했다.
그는 단순한 친일파와는 달리 일본의 신토를 깊이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개국 신화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 여신을 위한 소형 감실인 가미다나(神棚)를 집에 설치하여 아침 저녁 절을 했으며, 이를 전국에 널리 퍼뜨리기 위해 가미다나를 집집마다 비치하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그에게 댓가로 가미다나 독점판매권을 주었다. 1943년에는 황도선양회(皇道宣揚會)를 조직해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의식주를 모두 일본식으로 따르고 가족들에게 집안에서도 일본어만 쓰도록 강요할만큼 광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반강제적인 창씨개명 정책에도 적극 협조하여 성과 이름을 바꾼 뒤 씨명을 새로 고른 과정과 이유를 기고하며 홍보 활동에 나섰다. 일제는 그런 그에게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 자리를 주고 '애국옹(愛國翁)'이라는 별명을 달아주었다.
광복 후인 1949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1월 24일 영덕의 집에서 전격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그러나 몇달후 보석으로 석방되었고 반민특위가 강제로 해체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는 91세까지 장수했으며 두 명의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손들도 번창했다. 장손자인 문태준은 제3공화국, 제4공화국의 국회의원과 제6공화국 보건사회부 장관, 대한의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함께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모두 수록되었다.
분류: 1878년 태어남 | 1968년 죽음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