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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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함경북도 북평사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 장군이 임진왜란 중 의병을 모아 왜군을 격퇴한 공을 기려 조선 숙종 때 북평사 최창대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면 (현재는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세운 전공 기념 비석이다. 높이는 187cm, 너비는 66cm인 이 비석에는 당시 의병들의 활동과 공로가 1500글자 정도로 기록되어 있다.
[편집] 일제의 약탈
러일 전쟁 중이던 1905년, 일본군의 미요시 중장이 북관대첩비를 그대로 둘 경우, 일본군의 북진시 조선인들의 저항을 받을 수 있으니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일본 왕실에 타전했고 이를 승인 받아 일본으로 약탈 반출하였다. 그 뒤 일본 왕실에서 보관하다가 야스쿠니 신사로 옮겨졌다.
[편집] 반환의 역사
- 1909년 당시 일본 유학생이던 조소앙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이 비를 보고는 대한흥학보에 〈북관대첩비 사건의 소감〉이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국권이 일본에 넘어갈 상황이라 누구도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
- 1978년 재일 한국인이자 한일 관계의 권위있는 연구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우연하게 야스쿠니 신사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하였다. 그 후 당시 박정희 정부에 이 사실을 통보하였고, 한국 정부는 일본에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1979년 박정희의 암살과 더불어 성사되지 못하였다.
- 2005년 3월 28일 한일 불교복지협의회가 베이징에서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과 만나서 최종적으로 북관대첩비를 북한에 반환하기로 합의하였고, 그 합의문 채택결과를 주한 일본대사관에 알렸다.
- 2005년 5월 20일 주한 일본대사관은 "남북 당국간 합의 뒤 한국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반환이 가능하다"라는 회신을 하였다.
- 2005년 6월 23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 15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북관대첩비 반환 사업을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한 후 외교통상부를 중심으로 반환 요청 작업이 가속화 되었다.
- 2005년 10월 3일 야스쿠니 신사의 이사회는, 북관대첩비 반환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의 문화재청 산하기관인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의 팀이 야스쿠니 신사에 파견되어 9일부터 북관대첩비 이전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 2005년 10월 12일 한편, 한국과 일본 정부는 북관대첩비 인도문서에 서명하였고, 철거에 필요한 기술적 지원을 하기로 합의하였다.
- 2005년 10월 15일 한국과 일본의 각계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서 북관대첩비 반환을 앞둔 전통의례인 고유제’(告由祭)를 치렀다.
- 2005년 10월 20일 북관대첩비를 실은 대한항공 화물기가 한국에 착륙하였다.
- 2005년 10월 28일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신축된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식때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일반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일반 공개되었다. 북관대첩비는 박물관의 전시동 으뜸홀에 비치되었다. 잠시 박물관에서 전시를 한 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 2005년 11월 경복궁에서 북관대첩비의 복원공사 후, 공식 제막식을 하였다. 을사조약 100주년인 11월 17일이었다.
- 2006년에 서울특별시에서 해체 작업을 한 뒤 3월 1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넘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