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조지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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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3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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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 |
1760년 ~ 1820년 | |
왕 비 | 샬럿 소피아 |
황 후 | {{{황후}}} |
왕 후 | {{{왕후}}} |
부 군 | {{{부군}}} |
앞선 왕 | 조지 2세 |
앞선 황제 | {{{이전 황제}}} |
다음 왕 | 조지 4세 |
다음 황제 | {{{다음 황제}}} |
영국의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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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4세 |
빅토리아 |
조지 3세(영어: George III, 1738년 - 1820년)은 영국의 왕(1760년 - 1820년)이다. 본명은 조지 윌리엄 프레드릭 하노버(영어: George William Frederick Hannover).
그의 치세 동안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에서 혁명이 일어나 신흥국가 미국의 탄생을 허용했으며 유럽과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 등으로 일대 전쟁을 치렀다.
[편집] 생애
어린 시절 조지는 아버지인 왕세자 프레드릭을 미워했던 조부 조지 2세에 대해 마음 깊이 반감을 품고 있었다. 특히 감수성이 강한 시절에 겪었던 이런 경험은 그에게 일종의 자폐증을 불러왔다. 조지는 가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때가 많았고, 11살이 될 때까지 글을 정확히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조지가 11살이 되던 즈음 아버지 프레드릭이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그는 무척이나 아버지의 정을 그리워했다. 그가 어머니 오거스트와 깊은 관계에 있던 뷰트 백작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조지 2세의 아들들이 모두 조지 2세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조지 2세가 서거하자 프레드릭의 아들인 손자 조지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때의 나이 22살이었다. 그는 앞선 증조부, 조부, 그리고 아버지와는 달리 독일 악센트가 전혀 없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였다. 또한 학문적으로 탁월한 자질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항상 노력하는 학구적인 모습을 보인 인물이었다. 역대 어느 왕보다도 독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하루 중 상당한 시간을 개인기도로 보낼 때가 많았다. 그가 왕으로 즉위한 후 제일 먼저 했던 일도 종교적 배경 하에 조부의 비도덕적인 왕실의 관행들을 뜯어고치는 것이었다.
조지 3세가 왕위에 오를 즈음 정치를 좌우하던 대 피트가 1761년 10월 에스파냐와의 전쟁문제로 사임하고 또 한 명의 정치가인 뉴캐슬 공작 펠럼 홀리스도 곧바로 재정비리 의혹으로 사퇴했다. 조지 3세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였던 뷰트를 수상 자리에 올렸다.
7년 전쟁이 끝난 후, 뷰트 내각은 정국 안정과 전쟁으로 인해 악화된 재정 회복이라는 2가지 당면과제를 안게 되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발전과정에 놓여 있는 상태로 아직 효율적인 행정기구를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의회 지도자들은 정부에 협조하기보다는 정부의 정책에 트집을 잡는 것이 일과였으며, 심지어 이런 트집은 각료들 사이에서도 일상사였다. 이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던 조지 3세는 먼저 상원의 원로귀족들을 통합시키는 작업을 생각하였다. 이 일은 조지 3세의 측근인 수상 뷰트가 담당했다. 정가에서는 이를 국왕이 수상의 손을 빌려 적대세력을 제거하려는 음모와 책략쯤으로 인식했다. 정국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재정 회복은 더욱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에 뷰트 내각은 조지 3세의 기대에 제대로 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급진파 의원인 존 윌크스가 언론을 동원하여 조지 3세에 대한 비방을 퍼부어대고 대 피트와 뉴캐슬을 동정하는 일부 정객들이 “평화는 어설픈 사기극이며 국왕이 수상과 협잡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공격하기 시작하자 뷰트 내각은 급속히 무너지게 되었다. 1763년 4월 뷰트는 수상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조지 3세는 어린 시절 자주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었던 뷰트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실제로 뷰트는 정치적으로는 무능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조지 3세는 측근을 통한 정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왕실 친척인 조지 그렌빌과 컴벌렌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 대 피트, 그리고 그래프턴 공작에게 자신의 의중을 보이면서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오히려 7년 전쟁으로 인해 타격을 입은 왕실의 재정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떠한 타개책도 강구되지 못하고 상황만 어려워졌다. 당시 동인도회사를 중심으로 진행된 해외무역은 나날이 번창하고 있었으나, 동인도회사는 민간 회사였기 때문에 그들의 막대한 수익은 본국 경제에 실제로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정가에서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운용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이는 것을 비난하며 정책 강구를 촉구했다. 이에 내각은 식민지를 운용하기 위한 행정비용을 식민지 자체에 부담시키는 정책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렌빌이 제의한 인지세법은 이듬해 로킹엄의 주도로 폐지되었고, 간접세 부과를 위한 타운센드법은 산출량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차세를 제외하고는 주민들에 의해 무효화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것은 식민지의 본국에 대한 반감밖에 없었다. 마침내 보스턴 차 사건이 문제의 초점이 되면서 영국은 1775년 4월 아메리카와의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에 조지 3세는 노스를 수상에 임명하여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전쟁 승부에 관계없이 그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선언하였다. 당시 조지 3세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란 잠재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조지 3세의 생각과 다르게 전개되어갔다. 사실 의회는 점점 깊이 빠져드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또 의회는 아메리카와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가까운 아일랜드로 하여금 반기를 들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또한 1778년 이후 프랑스가 전쟁에 개입하고 있으므로 세력균형이란 국제외교적 분위기에서도 결코 영국에 이득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우려하고 있었다. 결국 의회는 불리해져 가는 상황을 들어 조지 3세에게 전쟁을 끝내도록 요구했으나, 조지 3세는 특유의 필사적인 집착으로 전쟁을 2년 더 연장시켰다. 그러다 보니 조국에 재알을 안겨준 책임에 따른 의회의 공격은 노스 내각에 집중되었다. 또한 국민즐조차 노스 내각의 전쟁 수행 능력에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노스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국내여론에 못 이겨 1782년 조지 3세의 만류에도 스스로 사퇴하였다. 그리고 노스가 스스로 수상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순간, 영국의
노스 내각의 붕괴로 충격을 받은 조지 3세는 급기야 셸번을 다음 수상으로 임명했지만 그 내각마저도 단명하면서 왕의 위신은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늘 왕을 비판하던 휘그당의 찰스 제임스 폭스와 노스 경이 만나 연립내각의 구성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조지 3세는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런 형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얻었다. 아메리카를 잃은 뒤 식민지에 대한 주된 관심사는 인도가 되었는데, 인도에는 일찍부터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어 많은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민간회사였으므로 정부로서는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 점을 부당하게 여긴 폭스와 노스는 동인도회사를 정부가 관장하는 동인도회사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여론은 회사의 개혁안을 통해 시행되는 공직임명권을 통하여 폭스와 노스가 권력을 영속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되었다. 조지 3세는 상원에서 동인도회사 개혁안을 지지하는 의원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적으로 간주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의 선언에 따라 법안은 무효화되고 폭스를 비롯한 관련 각료들은 줄줄이 사퇴했다.
국왕으로서의 위신을 되찾기 위해 조지 3세는 자신의 뜻을 잘 진행시켜줄 새로운 수상으로 소(小) 윌리엄 피트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피트의 세력은 하원 내 소수파에 불과했기에 경질된 각료들은 당장에라도 헌법상의 정변을 단행하기라도 할 태세였다. 노스 내각 이후 왕이 직접 임명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보니 모든 것은 1784년 3월의 총선 결과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결론은 소 피트 내각이 성립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소 피트가 수상이 되어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정책들을 제시했을 때, 조지 3세는 상당 부분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이들 정책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소 피트도 조지 3세의 입장을 일부 묵인하는 조건으로 그로부터 막대한 통치 권력을 이양받았다.
1810년 막내딸 아멜리아 공주가 죽자, 큰 충격을 받은 조지 3세는 이듬해 앞서 몇 번이나 있었던 지병인 착란증세를 다시 일으켰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의회는 왕세자의 섭정권을 인정하고 소피아 왕비에게 조지 3세의 보호감호를 위탁하는 칙령을 공표했다. 조지 3세는 간혹 평정 상태를 되찾기는 했으나 끝내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1820년 1월 29일 윈저 궁전에서 서거했다.
[편집] 가족 관계
- 왕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럿 소피아
- 조지 4세
- 요크 공 프레데릭 오거스트
- 윌리엄 4세
- 샬로트 오거스타 마틸다
- 켄트 공 에드워드 오거스트
- 오거스타 소피아
- 엘리자베스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 서섹스 공 오거스트 프레데릭
- 케임브리지 공 아돌프 프레데릭
- 메리
- 소피아 마틸다
- 옥태비어스
- 알프레드
- 아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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