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빅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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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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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 |
1819년 ~ 1901년 | |
왕 비 | {{{왕비}}} |
황 후 | {{{황후}}} |
왕 후 | {{{왕후}}} |
부 군 | 작센공 앨버트 |
앞선 왕 | 윌리엄 4세 |
앞선 황제 | {{{이전 황제}}} |
다음 왕 | 에드워드 7세 |
다음 황제 | {{{다음 황제}}} |
영국의 군주 |
조지 1세 |
조지 2세 |
조지 3세 |
조지 4세 |
윌리엄 4세 |
빅토리아 |
빅토리아(영어: Victoria, 1819년 5월 24일 – 1901년 1월 22일)는 영국의 여왕(1837년 6월 20일 - 1901년 1월 22일)이자 인도의 여제(1877년 1월 1일 - 1901년 1월 22일)다. 본명은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하노버(영어: Alexandrina Victoria Hanover), 정식 칭호는 ‘HRH Alexandrina Victoria Hanover von Witten and Saxe-Coburg and Goetha, Dei Gratia Queen of All Britons, Defender Of The Faith, and Empress of India’다.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재위한 영국의 군주로서 그녀의 재위 기간은 ‘빅토리아 시대(The Victorian)’로 통칭되며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와 일치한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즉위 이전
빅토리아는 조지 3세의 넷째 아들인 켄트 공작 에드워드와 독일의 작센-코브르크 가문의 후손인 빅투아르 공작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어머니인 빅투아르 공작 부인과 사랑에 빠져 있던 아일랜드 출신의 존 코로이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당시 빅토리아는 아버지의 빈 자리를 외삼촌이자 사촌 형부인 레오폴드가 채워주고 있었다. 빅토리아와 레오폴드의 관계는 레오폴드가 1831년에 벨기에의 왕으로 선출되어 떠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사실 빅토리아는 원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할아버지 조지 3세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조지 3세는 15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왕위를 계승한 조지 4세의 유일한 적통 샬럿 어거스타 공주가 1818년에 죽자, 그의 직계손 중에는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에 조지 4세의 동생 클러랜스 공, 켄트 공, 케임브리지 공 등 3명은 왕위 계승자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 경쟁에 돌입했다. 영국 왕실의 왕위계승법에 따르면, 먼저 자손을 얻는 자가 왕위 계승권자의 아버지가 된다. 여기에서 켄트 공이 승리를 거두었다. 외동딸 빅토리아를 얻은 것이다. 그녀개 태어난 다음해 아버지 공작과 요크 공에 이어 세번째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다. 이후 클러랜스 공이 윌리엄 4세가 되고, 요크 공이 1827년에 사망하자 그녀가 다음 왕위를 이을 자로 낙찰되었다.
빅토리아가 왕위를 이를 혈통으로 정해지자 존 코로이는 빅토리아의 어머니인 빅투아르 공작 부인과 합세해서 빅토리아를 친가 쪽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고립시키고,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어 장차 자신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렸다. 빅투아르 공작 부인 역시 빅토리아를 차기 여왕으로 내세워 독일인이자 미망인이라는 이유로 위태로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왕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빅토리아에게는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고, 그로 인해 빅토리아는 점차 어머니한테서 멀어져 사사건건 충돌하며 갈등을 빚게 되었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도 결코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았다.
1837년 빅토리아가 18살 생일을 맞은 뒤 26일 만에 셋째아버지인 (큰아버지는 조지 4세, 둘째아버지는 요크공 프레데릭), 윌리엄 4세가 서거하고 그의 뒤를 이어서 빅토리아는 즉위하였고, 하노버 왕가가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즉위와 동시에 조지 1세 때부터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 관계는 끝나게 되고, 그녀는 영국 왕위만을 계승하였다. 그 후로 64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1877년에는 영국의 군주 중 최초로 인도의 군주를 겸하게 되었다. 이 때 빅토리아는 차기 여왕으로 내정받자 곧바로 무릎을 꿇고 성서를 펼친 뒤 “주여, 제가 영국의 여왕이 되면 당신의 말씀대로 통치하게 해주소서”하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편집] 즉위 이후
즉위 후 빅토리아는 일단 버킹엄 궁전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자신의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방으로 쫓아내고 콘로이도 연금을 주어 퇴직시켰다. 외삼폰 레오폴트도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는 내각의 정중한 경고를 받았다. 마침내 혼자가 된 빅토리아는 난생 처음 얻은 자유를 마음껏 즐겼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 불어닥친 경제공황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1832년 선거법 개정으로 중산층에도 선거권이 주어지자, 이에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이 헌장을 선포하고 자신들의 권익들이 관철되기를 요구하였다. 이를 차티스트 운동(Chartism)이라고 하는데, 노동운동의 투쟁방법이 러다이트 운동(기계파괴를 통한 자본가와의 투쟁)등의 과격한 방법에서 정치참여를 통한 영향력 행사라는 온건한 방법으로 바뀌었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사건이다. 빅토리아는 그런 국민들의 모습들을 보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그런 까닭에 여왕으로서의 집무가 시작되자마자 매일 1시간 이상을 멜버른 수상을 만나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익혀 나갔다.
빅토리아 치세의 첫번째 위기는 1839년에 두 차례 있었다. 둘 다 빅토리아의 정치적 당파심 때문에 생겨난 위기였다.
첫 번째 위기인 ‘헤이스팅스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다. 휘그당(자유당) 쪽을 열렬히 지원하던 빅토리아는 토리당(보수당)과 관련이 있는 궁중 시녀 플로라 헤이스팅스에 대하여 늘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즈음 빅토리아는 그녀에게 임신했다는 혐의를 씌워 강제로 의사의 진단을 받게 했다. 만약 임신이 확인된다면 그녀를 쫓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진단 결과 여왕의 오해였다는 사실로 밝혀졌는데, 문제는 뒷공론이 무성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해 말에 플로라가 뜻밖의 질병으로 죽자, 훨씬 더 험악한 유언비어가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국민들의 여왕에 대한 지지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또 한 차례의 위기는 ‘침실 위기’로 불린다. 1833년 윌리엄 윌버포스 등의 진보적 국회의원들이 펼친 노예 제도 반대 운동의 결실인 노예 해방령을 거부한 자메이카는 영국의 자치령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이 플랜테이션 경작지로 각광을 받자 멜버른은 이곳에 자치권을 주려 하였다. 그러나 1839년 5월 그 안건이 5표 차이로 부결되면서 그도 수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새로이 당선된 수상은 보수당(토리당의 후신) 당수인 로버트 필이었다. 그는 반대 정파인 휘그당원 일색인 여왕의 시녀들이 여왕의 침실 근처에 있는 한 공평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고 이들을 모두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빅토리아는 멜버른의 격려를 받아 단호히 이 요구를 거부했다. 필은 수상직을 포기했고, 멜버른이 다시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빅토리아가 여왕 즉위식을 마친 얼마 뒤부터 혼사 문제가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배우자로 1순위에 오른 인물은 빅토리아의 외사촌이며 독일계 왕족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작이었다. 그가 영국을 방문하기 위해 윈저 궁전에 도착한 지 불과 5일 뒤인 1839년 10월 15일, 빅토리아는 앨버트의 미모와 인품에 매혹되어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빅토리아와 앨버트는 1840년 2월에 결혼을 하였다. 앨버트는 빅토리아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남편을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였으며 1861년 남편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아 한동안 두문불출하기도 하였다. 남편 앨버트 공도 아내를 사랑하여, 이기적인 데가 있었던 빅토리아가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심을 받는 여왕으로서 정치를 잘 할 수 있게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빅토리아는 앨버트와의 사이에 4남 5녀를 두었으며 대부분의 자녀들이 유럽의 주요 왕족과 결혼하여 말년에는 유럽의 할머니로 불렸다.
남편의 죽음으로 한동안 침울했던 빅토리아는 B.디즈레일리의 설득으로 다시 마음을 바로잡았으며, 행복한 말년을 보낸 뒤 보어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 1901년 1월 22일 82살의 나이에 서거한 그녀는 하노버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으며 그녀가 죽고 나서 현재 윈저 왕조의 전신인 삭스-코버그-고타 왕조(작센-코부르크-고타의 영어식 발음)가 시작되었다.
빅토리아는 입헌 군주로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랐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였으나, 그녀의 정절과 화목한 가정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도덕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실례로 영국의 성공회 작가인 C.S.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를 보면, 보수적인 성 문화를 빅토리아 시대의 성 문화에 빗대는 문장이 있다.
그녀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군주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녀의 이름은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을 비롯한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지명과 건물명으로 남아 있다. 또한 오늘날 남아있는 유럽 군주들의 대부분은 그녀의 자손들이다.
[편집] 직함
- 1819-1837: Her Royal Highness Princess Victoria of Kent
- 1837-1901: Her Majesty The Queen
and, occasionally, outside of the United Kingdom, and with regard to India
- 1876-1901: Her Imperial Majesty The Queen-Empress
[편집] 가족 관계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앨버트(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Duke in Saxony)
- 빅토리아 아델라이드 메리 루이즈(The Princess Victoria, Princess Royal) 1840.11.21-1901.8.5
- 에드워드 7세
- 앨리스 모드 메리(The Princess Alice) 1843.4.25-1878.12.14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에든버러 공작 앨프레드 어니스트 앨버트(Alfre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1844.8.6-1900.7.31
- 헬레나 오거스타 빅토리아(The Princess Helena) 1846.5.25-1923.6.9
- 루이즈 캐롤라인 앨버타(The Princess Louise) 1848.3.18-1939.12.3
- 코넛 및 스트래선 공작 아서 윌리엄 패트릭 앨버트(Arthur, Duke of Connaught and Strathearn) 1850.5.1-1942.1.16
- 앨바니 공작 레오폴드 조지 던컨 앨버트(Leopold, Duke of Albany) 1853.4.7-1884.3.28
- 베아트리스 메리 빅토리아 페오도라(The Princess Beatrice) 1857.4.14-194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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