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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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許蔿, 1854년 4월 1일 ~ 1908년 10월 21일)는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아호는 왕산(旺山).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전국에서 이에 반발하는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그도 경상도에서 이기찬, 이은찬 등과 함께 두 차례 의병을 일으켰다.
대한제국 고종은 그를 등용하여 성균관 등에 기용했는데, 1904년에는 사법 기관인 평리원의 재판장 서리가 되었다. 이해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이상천, 박규병 등과 함께 격문 살포로 저항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면서 또다시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전국에 흩어진 의병부대들이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 진공을 노렸을 때 의병 연합군인 13도창의군(총대장 이인영)의 진동창의대장을 맡았다. 허위의 부대는 서울 근교까지 진군하였지만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조인환, 권준 등과 연합하여 계속해서 유격전을 벌이면서 계속 저항했고, 거듭되는 여러 회유책에도 굽히지 않았다. 이강년, 유인석, 박정빈 등과 함께 결사 항전을 부르짖는 강경파로 활동하면서, 한일 강제 병합 음모를 진행 중이던 일본을 괴롭혔다. 결국 1908년 양평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가두었던 서대문 형무소의 제1호 사형수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허위는 4형제 중 막내였는데, 그의 맏형은 항쟁에 군자금을 댔고 셋째형 허겸은 의병 투쟁을 함께 했다. 일제의 국권 침탈 음모를 내다보고 격렬히 저항한 허위의 집안은 그의 죽음 이후 더이상 선산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견디다 못한 허겸이 허위의 4남 2녀를 동반하여 1912년 서간도로 망명했고, 사촌들도 이어 그의 뒤를 따랐다. 결국 허위의 조카인 허형식을 비롯해 많은 후손들이 독립 운동에 나섰는데, 이로 인해 자손들이 해외에 뿔뿔히 흩어졌고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독립 운동가의 자손들이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문제가 제기될 때 허위의 후손들 예가 종종 인용되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왕산로는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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