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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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吳世昌, 1864년 음력 7월 5일 ~ 1953년 4월 16일)은 한국의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예술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서예가이기도 했다. 아호는 위창(葦滄), 천도교 도호는 한암(閒菴)이다.
1864년 서울 출생으로, 중국어 역관(譯官)이자 구한말의 선각자로 잘 알려진 오경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대로 외국어를 익혀 개화 사상에 일찍 눈을 뜬 중인 집안에서 자란데다 개화파의 거두인 스승 유홍기의 영향까지 받은 오세창이 개화 운동에 참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879년 역과에 합격하여 공직에 나아갔는데, 1885년 박문국에 발령받아 주간 관보인 《한성주보》 기자가 되면서 언론인으로 입문하게 된다. 이후 군국기무처, 농상공부, 우정국 등을 거쳤고, 특히 1897년 토쿄외국어학교에 조선어과 교사로 파견되어 일본에서 1년 가량 교사 생활을 하면서 근대 문물을 직접 접했다. 1902년부터 일본에 망명해 있던 중,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6년 천도교 기관지를 겸한 일간지 《만세보》 사장으로 계몽 운동을 펼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1909년 대한협회가 창간한 일간지로서 반일 논조를 분명히 한 《대한민보》 사장도 맡았다. 천도교 내부에서는 권동진과 함께 개화에는 찬성하되 일본과의 합병에 반대하는 이른바 문명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합병 청원으로 개화할 것을 주장하는 일진회 계열과는 대립하여 결국 이용구를 몰아낸다. 안중식의 동양화 〈탑원도소회지도〉(1912년)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오세창의 정원 누각에 천도교 문명파 인사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1919년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2년여 동안 투옥되었다.
이후로는 서예가, 전각가(篆刻家) 및 서예학과 금석학 역사가로 주로 활동했다. 1922년 초대 조선미술전람회(선전)가 열렸을때 서예 부문에서 수상했고, 서화사 연구에도 뛰어들어 《근역서휘》, 《근역화휘》, 《근묵》, 《근역인수》, 《근역서화징》 등을 펴내었다. 1918년 설립된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동안 변절하지 않은 독립운동의 원로였기에, 광복후 고령에도 불구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일명 건준) 위원,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일명 민주의원) 의원, 서울신문 명예사장 등에 위촉되었고, 우익 계열의 보수 정당 한국민주당도 창당때 그를 공동 당수로 영입하려 시도했다. 한국 전쟁 때 대구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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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 김병로 | 오세창 | 이강 | 이애라 | 문양목 | 권인규 | 홍학순 | 최재형 | 조시원 | 장지연 | 오의선 |
민족대표 33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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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 |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
천도교 : |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
불교 : | 한용운 백용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