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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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은 조선 수군의 지휘관 이순신이 임진왜란 직전에 건조한 세계 최초의 철갑 군함이다. 임진왜란 중 사천 해전에서 첫 출전한 이래 일본 수군에게는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당시 기록에는 거북을 한자로 옮긴 ‘귀선(龜船)’으로 적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인들에게는 사치호코(金魚虎,しゃちほこ)와 닮은 복카이센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1]
1973년 9월 대한민국에서는 500원권의 앞면에 이순신과 거북선을, 뒷면에는 현충사를 도안으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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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역사 기록
- 1592년 조선 수군이 승리한 한산도 해전과 당포 해전에서는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여 크고 작은 총통들을 쏘아대어 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렸다고 한다.[2]
- 1595년에는 비변사에서 건의하기를 거북선이야말로 해전에서의 승리에 요긴한 것이고 적이 가장 꺼리는 것이라고 보고하며 경상도와 전라도의 방어를 위해 거북선의 제조를 서둘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3] 거북선은 판옥선이 사수와 격군의 125명 정도를 수용하는 데 비해 적게 수용되기 때문에 주로 각 영에 1척씩만을 배치하여 선봉으로 삼았다.
- 1606년(선조 39년)에는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판옥선과 거북선의 장점을 결합하여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아 만든 창선을 만들었는데 격군 42명이 저었으며 판옥선보다 훨씬 빨랐다.
- 1622년에는 광해군이 다시 거북선을 만들어 수군을 재정비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 1687년에는 기존 전선 3~4척을 개조하여 거북선으로 만드는 것과 임진왜란 때와 가능한 같이 만들어 크기가 커지는 것을 경계하도록 영의정 김수항이 건의했다.
- 1735년에는 별군직 윤필은이 이삼과 더불어 거북선을 개조하였는데 이 때는 3층 구조의 가장 위층에 설치된 방패를 탈착식으로 개조하고 선두에 곡목을 덧붙여 뽀족하여 풍랑을 뚫고 가기에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 때 그 모형을 내전에 가지고와 선보였다고 한다.
- 또한 1751년의 기록에는 영남 균세사 박문수가 전선이 개조할 때마다 길어지고 커져서 운용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그는 이순신의 기록에는 거북선 좌우에 각각 6개의 총구가 있으나 그 때는 8개가 있어 원래대로 줄일 것을 주장하였다.[4]
- 1808년 순조는 전 통제사 이당에게 거북선에 대해 묻고 이당이 대답하기를 ‘통영의 수군에 아직 거북선이 있으며 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고 노 없이 떠다닐때는 마치 거북이 떠있는 듯한 모습이며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나오는데 아직도 왜인들이 이를 보면 사람 잡는 기계라며 놀란다’고 보고하였다.[5]
- 1867년 의정부에서 거북선의 재배치에 관한 정책을 건의하였다.
[편집] 구조와 성능
거북선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적함과 충돌하여 결정적인 해전의 승리를 이끌어내는 돌격선의 역할을 하는 견고한 함선이였다.
이분(李芬)의 《이순신행록(李舜臣行錄)》에 의하면, ‘위에는 판자를 덮고 그 위에 십자로 좁은 길을 내어 다닐 수 있게 하였고 나머지는 칼과 송곳을 총총히 꽂아서 사방으로 적이 기어올라 발붙일 곳이 없었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달았고 그 입에는 총구멍을 만들고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달았다. 그 모양이 마치 거북의 모양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거북선[龜船]이라 하였다.’
이후에 이순신 장군에 의해 임진왜란전에 수군이 정비될때 대대적으로 개조되어 해전시 막강한 돌격선의 역할을 한것으로 보인다.
[편집] 규모
거북선은 본래 한쪽에 8문의 대포와 40명씩의 노군이 있는 약 100~150명이 승선하는 비교적 작은 배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대형화 되어 2층에서 3층으로 확장되고 선체도 길어지는 경향이 생겨났으며, 기존의 배를 개량하여 제작된 경우도 있었다. 왜선에 비해 소재와 설계 면에서 우수하고 단단하여 돌격하여 충돌하는 전법과 함포 전법에 이용되었다. 윗 갑판을 덮고 칼과 창으로 방어하여 일본 수군의 특기이던 접근하여 승선한 후 백병전을 벌이는 전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 외 연기를 내뿜는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18세기 숙종 때 수군의 재정비 때 거북선이 새로 만들어졌다.
[편집] 승선 인원
거북선 1척에는 약 150명이 승선하고 80~90명의 노군이 저었다.[6]
- 선직 2명, 무상 2명, 타공 2명, 요수 2명, 정수 2명, 사부 14명, 화포장 8명 포수 24명, 좡 포도장 각 1명, 노군 90명
[편집] 연간유지비용
- 42필 34자 6치 (숙종 42년 10월 24일 비변사 등록의 기록)
- 초둔:50번, 진석:520립, 생마:50근, 생갈:50동, 유오:3부, 유강식:3근, 표자:7개
[편집] 내부 구조
2층 구조로 내부에는 대포가 있는 층과 노를 젓는 층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물이 찰 수 있는 창고가 있는데 이것은 물을 채우고 양수기로 물을 빼고 했을 것으로 보인다. 확실치 않으며 3층 구조로 되어 있다는 학설도 있다.
[편집] 공격력
전후좌우로 화포가 설치되었고, 용머리에도 화포가 설치되었다. 또한 배 아래쪽에 용 모양을 한 충각전술용 돌기가 설치되었다. 이로써 거북선은 함대의 선두에서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선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거북선의 역할은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에 비견할 수 있다. 그리고 물창고에 물을 채우고 배를 가라앉힌 다음 돌기로 배를 들이 받는 공격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편집] 방어력
거북선 지붕 위에는 철갑으로 뒤덮혀 있었기 때문에 근접전에서 조총이나 화살 등의 무기를 막는데 뛰어났다. 일본 군함에 비해 튼튼한 구조와 재질로 인해 충돌 전법시에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편집] 기동성
대포가 설치된 선창의 아래층에는 노와 격군이 배치되었다. 격군은 노를 젓는 승무원을 가리키던 말이다. 보통 좌우 각각 10착(捉, 노의 단위)이 배치되고 1착의 노에 4명씩의 격군이 배치되고 사공(沙工)·무상(舞上)이 각각 1명씩 배치되어 82명이 한조를 이루었다.(비변사 등록 인조 20년 3월 5일의 기록) 이 법재는 임진왜란 이후 계속 써 왔으며 배의 크기나 무게도 그리 변하지 않았다. 배 밑 부분은 평평한 형태인 평저형이기 때문에 한반도의 남해, 서해와 같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에서 기동하기에 알맞았으며 이동 중에도 급속으로 180도 회전이나 좌 우측으로 방향 전환이 가능했다. 이 덕분에 학익진과 같은 다양한 해상의 기동 진법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다.
[편집] 참고 자료
분류: 임진왜란의 조선군 장비 | 조선의 군사 | 임진왜란의 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