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국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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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故國原王, ? - 371년)은 고구려의 제16대 왕(재위 331년 - 371년)이다. 휘는 사유(斯由) 혹은 유(劉), 교(釗)라고 한다. 고구려의 국력이 미약했을 때의 왕으로 선비족의 침입을 받아 부왕의 시신을 빼앗기고, 태후와 왕후가 잡혀갔었다가 조공을 바쳐 되돌려 받았고, 백제의 근초고왕의 침입을 받아서 평양성에서 전사한 비운의 왕이다.
[편집] 생애
고국원왕은 미천왕과 왕후 주씨의 맏아들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서기 314년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서기 331년 2월에 서거한 미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고국원왕은 즉위하자 전국을 순행하여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민심을 살피고 빈민이나 병환자 등을 구제하였다. 이렇게 민생을 먼저 돌본 후 당시 강성해져가고 있던 선비족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북쪽 지역의 성들을 보수하거나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선비족은 모용황의 지휘 아래 337년 연나라를 건국하고, 남하정책을 시도했다. 과연 연나라는 339년 고구려에게 동맹관계를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신진 강국으로 성장한 연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고구려가 이를 받아들이자 연나라는 군대를 철수했다.
고국원왕은 굴욕스러운 동맹조약에 따라 이듬해인 340년에 맏아들 구부를 연나라의 수도 양안에 입조시켰다. 그러나 고구려의 저자세에도 불구하고 연나라는 침략의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연나라의 왕 모용황은 중국대륙으로 진출해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구려를 제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국원왕은 연나라의 침략의도를 눈치채고 서기 342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그 외곽에 있는 국내성을 보수한 다음 일시적인 천도를 단행하였다. 평양성은 동천왕 시대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불타자 임시방편으로 옮겨온 곳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견고하지 못해 연나라의 침공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나라의 내부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데다 모용황이 용성으로 천도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거처를 옳기기로 예정된 동황성이 완공될 때까지 비교적 안전한 환도성에 머무르기로 결정한다.
이에 백성들은 갑작스런 천도에 당황하여 머지않아 연나라가 침략해온다는 소문이 돌아 불안해지게 되었다. 모용황은 이를 침략의 호기라 보고 342년 11월에 5만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연나라 군대는 남쪽 진로로는 모용황이 4만 명을 이끌고 진군했으며, 북쪽 진로로는 왕우가 나머지 1만 5천을 이끌고 고구려를 향해 진군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북쪽 길에는 고국원왕의 동생 고무가 정예군 5만 명과 함께 지키게 하였고, 고국원왕은 1만 명의 군사로 남쪽 길을 지키기로 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평탄한 북쪽 길로는 모용황의 정예군이 올 것이고, 험한 남쪽 길로는 왕우의 조력군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모용황은 그 상식을 깨고 자신이 남쪽의 험로를 향했고, 왕우에게는 북쪽의 평탄한 길로 가도록 하였다. 결국 이 같은 고구려의 착각에 의한 군사 배치 때문에 고국원왕은 남쪽의 험로로 먼저 밀려든 모용황의 군대를 이기지 못하고 호위명 몇 명만 거느리고 도주했으며, 미처 피신하지 못한 왕족들과 환도성의 백성들은 포로로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때 북쪽 길로 온 왕우의 군대가 고무의 군대에 의해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도착하자 모용황은 더이상의 진군을 포기하고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포로로 잡흔 태후 주씨와 고국원왕의 왕후를 비롯하여 도성민 5만 명을 연나라의 수도 용성으로 압송하였고, 도중에서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내 싣고 갔다. 이 때문에 고구려군은 퇴각하는 연나라 군대를 그저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잡혀간 포로들의 신변 보호 때문에 고구려는 연나라의 신하국이 되겠다고 서약해야만 했다.
343년 고국원왕은 드디어 완공된 동황성으로 펀도하였다. 그리고 동진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통해 연나라에 압력을 가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배후의 고구려를 염려한 연나라는 9월에 다시금 모용각이 군사들을 이끌고 고구려의 남소를 함락시키고 만다. 고구려는 자국민들이 인질로 볼모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싸우지 못한 채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에 대해 적대정책으로 일관해 오던 모용황이 348년에 죽고 그의 아들 모용준이 왕위에 오르자 고국원왕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모용준에게 친선정책을 펼치고, 포로들을 환국시켜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모용준은 고구려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포로들을 무사히 고구려로 돌려보내주었다.
이후 고구려와 연나라는 한동안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롭게 지냈다. 연나라는 모용준 이래 얼마동안 번영을 구가했지만 점차 지배층이 사리사욕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서쪽에서는 저족이 세력을 키우면서 진나라를 건국하여 연나라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고구려는 점차 쇠락해져가는 연나라의 영역으로 진출할 기회를 노리게 되나, 이즈음 한반도 남쪽에서 백제가 북진하고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서기 369년 9월 백제를 공격하나 치앙 전투에서 백제의 왕태자 근구수가 이끄는 군사에게 패해 오히려 몰리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370년에 연나라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백제는 이 상황을 노치지 않고 북진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371년 9월 고구려는 다시 한번 백제를 선제공격하였으나 패하 강가에 잠복해 있던 백제의 복병에게 습격을 당해 패하여 퇴각하였다. 백제는 승세를 놓치지 않고 고구려를 향해 진군하였고, 마침내 서기 371년 10월 백제의 왕 근초고왕이 직접 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 전투에서 고국원왕은 백제군이 쏜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쓰러진 고국원왕을 대신해 태자 구부가 군대를 이끌고 백제군에 대항하여 가까스로 평양성을 지켜냈지만, 화살에 맞은 고국원왕은 상처가 심해져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편집] 참고
앞선 왕 미천왕 |
제 16 대 331년 - 371년 |
다음 왕 소수림왕 |
고구려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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