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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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375년 - 413년)은 고구려의 제19대 왕(재위: 391년 - 413년)이다. 호태왕(好太王),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불렸으며, 휘는 담덕(談德)이다. 묘호로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외에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등이 있다. 선왕들이 이룩해 놓은 굳건한 국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고구려의 기상을 드높였다.
[편집] 생애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을 강화하고 문화를 발전시켜 중흥의 길을 걷기 시작한 374년에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살에 왕태자가 되었고, 18살에 고국영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왕이 되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하면서 선왕들이 이룩해 놓은 굳건한 국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고구려의 기상을 드높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먼저 예성강을 경계로 대립해 있던 백제를 공격하였고, 392년에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관미성, 석현성을 비롯해 10개의 성을 빼앗았다. 396년에는 다시 수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백제의 58개의 성을 점령,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지리적으로 중요한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으며, 왕제와 대신 10명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또 398년에는 숙신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강화하였고, 400년에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왜가 신라를 침입하여 신라 내물이사금이 구원병을 요청하자 5만 명의 군사를 파견해 왜구를 격퇴함에 이어 가야를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407년에는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6개의 성을 빼앗고 백제를 완전히 제압했다. 또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쳐서 막강한 힘을 과시한 뒤 그 대가로 신라의 인질을 데려갔다.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에 대한 열정은 끝이 없었다. 당시 연나라는 중국대륙의 둥북 지방에 위치해 있었는데, 고구려와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광개토대왕은 후연이 고구려의 서쪽 지방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후연의 숙군성을 쳐서 빼앗고, 이어 현도, 요동의 두 성도 함락시켰다. 또한 후연의 중심지인 연군까지 진출하여 연나라를 복속시켰다. 한편, 고구려 출신 연나라 사람인 고운이 연왕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하여 고구려와 군신 관계를 맺었다. 결국 고구려는 후연 공격으로 요동을 확보하여 만주 지방의 주인이 되었다. 410년에 지배권 내에 있던 동부여를 재차 공략하여 64개성 1400개의 마을을 완전 병합하였으며 같은 해 동예(東濊) 역시 완전 병합하였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에도 많은 힘을 기울여 사회 질서를 안정시켰다. 또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413년 39살의 나이로 의문사하였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장수왕이 확장 영토를 기반으로 백제를 완전 점령하고 유연과 함께 현재 내몽골 지방의 지두우를 분할 점령하였으며, 내치를 다져 나라 안으로도 안정을 꾀하게 되어 고구려는 당대 동아시아의 최강국이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초기 장군총으로 비정되었으나, 현재는 광개토대왕릉비와 더 가까이에 위치한 태왕릉으로 보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생애와 업적은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되어 있다.
[편집] 참고
앞선 왕 고국양왕 |
제 19 대 391년 - 413년 |
다음 왕 장수왕 |
고구려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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