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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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남(金應南)(~ 1598년 11월 24일)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扈從)한 문신이다.
1568년(선조 1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예문관, 홍문관, 제주 목사, 좌부승지, 대사헌,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 한성부 판윤(지금으로 치면 서울시장 격)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 부체찰사로서 평안도로 피란하는 왕을 따라나섰고, 이조판서가 되어 왕을 따라 환도한 뒤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김응남은 남응운, 김상용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전서의 대가였다. 특히 노수신, 이산해와 만들어 낸 조광조의 신도비명은 최고의 역작이라고 칭송받았다고 한다(참고로 이산해는 김응남의 처남이기도 하다).
김응남은 이순신과 원균과 관계에서 대체로 원균을 옹호하고 이순신을 깍아내렸다. 조선왕조실록 선조편에서도 그의 발언은 원균을 계속 두둔하는 것으로 일관하였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에는 이순신의 전공을 그의 부하인 정운이 독촉하여 마지못해 이순신이 출전하여 거둔 것이라고 하였고, 이어 1월 27일에는 "수군으로써는 원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등 윤두수와 함께 이순신에 대한 경계심과 반감을 계속적으로 보였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 2등으로 원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