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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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이란의 역사
[편집] 아리얀족의 이주와 메대 왕국
지금의 이란 땅에 처음으로 페르시아인들이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9세기경이다. 흑해 북부지방인 러시아 남부지역으로부터 아리얀족들이 부족별로 지금의 이란지역으로 남하해왔다. 그 중 대표적인 민족이 파르사족과 메대족이었다. 메대족이 먼저 강대국으로서 국가를 형성하였고 파르사족은 메대족의 지배를 당하는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초에 메대족을 이어 파르사족이 중동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모계는 메대의 왕손이었고 파르사족의 피를 이어 받은 키루스가 기원전 533년에 아케메니드조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때 조로아스터교가 이란인들의 종교로 유입되었다. 키루스는 구약 성경에 고레스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며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묘사되고 있을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은 인물로 매우 유명하다.
아케메니드조는 절대군주체제로서 다리우스 왕은 자신을 ‘왕중왕’이라 부르며 높은 보좌에 군림하였다. 사방의 모든 민족들이 매년 아케메니드조 페르시아 제국에 조공을 바칠 정도로 페르시아 제국은 강성해졌다.
그러나 이 제국도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와 오랜 전쟁을 치뤄야 했고 기원전 330년에 결국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당하고 말았다.
[편집] 알렉산더의 침공
알렉산더 제국의 지배하에서 그리스 문물이 이란 지역에 까지 흘러 들어왔고 후세에 헬레니즘 문화라고 불리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리스인들의 지배후에 이란은 뒤 늦게 남하해온 한 유목민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들의 제국은 파르티아라고 불렸다.
[편집] 파르티아 제국
기원전 250년 경에 세워진 파르티아 제국은 전통적인 페르시아 제국의 절대 왕정과는 다른 정치체제로 세워졌었다. 유목생활을 하던 지배층 민족은 거대한 제국을 통솔할 만한 정치지도력이 없어서 기존의 지방세력들을 그대로 정치세력으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파르티아 제국은 수많은 소공국들로 구성된 연방국가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파르티아 제국 안에는 페르시아족을 비롯하여 쿠르드족, 아프간족들이 나름대로 소공국을 형성하여 포함되어 있었다. 파르티아 제국은 서쪽의 로마제국과 대치하였으며 강력한 로마제국과의 많은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은 강대국으로 오랫동안 지금의 중동지역에서 세력균형을 이루었다.
[편집] 사산조 페르시아
파르티아 제국의 뒤를 이어 이란 땅에는 또 다시 절대군주체제의 전통적인 이란 국가인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226년에 건국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은 국교로 조로아스터교를 선포하였고 강력한 군주체제를 부활시켰다.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때까지 이란인들의 생활모습은 오늘날 이란인들의 생활모습과는 다른 면이 많다.
그들은 1년중 낮이 밤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는 춘분인 3월 21일을 가장 중요한 명절로 지켰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상징과도 같은 불을 숭상했다.
[편집] 이슬람화
사산조는 7세기경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현한 아랍 이슬람 국가의 침공을 받아 서서히 조로아스터교대신 이슬람교를 그들의 종교로 따르게 되었다.
이란인들은 공식적으로 1258년까지 아랍인의 지배를 받았으며(물론 10세기에 페르시아 국가를 지향하는 사만조라는 페르시아 왕국이 세워졌었지만) 1256년부터는 몽골의 침입을 받았으며 몽골인이 지배하는 일한제국에 편입되었으며 또 다시 16세기 초까지 튀르크족이 세운 셀죽제국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편집] 이란근세:사파비 왕조
1501년 이란에서는 다시 모든 외세를 물리치고 이스마일 1세에 의해 사파비 왕조가 건국되어 1749년까지 국가가 지속되었다.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내세우면서 시작된 사파비조는 압바스 1세의 통치기(1588-1629)에 정치적, 문화적으로 최대 절정기를 누렸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제정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침략(1724년), 아프간 왕국의 침공(1739년) 등을 당하는 등 쇠퇴의 길을 걷다가 1794년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카자르 왕조가 대를 잇게 된다.
[편집] 이란근대:카자르 왕조
사파비조 이후에 1794년에 카자르 왕조가 세워져 1925년까지 이어짐으로써 근대 이란의 모체가 되었다.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이란은 러시아 제국과 영국 사이의 전쟁터였다. 외세의 개입에 반대하는 신진 지식인들이 단체를 결성하여 외세에 대항하였으며 이들 세력에 의해 이란의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1906년 입헌 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입헌 군주제가 이란의 세로운 정치제도가 되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이란은 1907년 러시아와 영국의 보호지대로 분할되었으며 1914-18년 사이에 발생한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이란의 석유로 인해 양 세력들의 목표물이 되어 전쟁터로 변했다.
1919년 이란은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편집] 이란현대 : 팔라비 왕조
1921년 리자 칸이 쿠데타를 성공시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1925년, 카자르 왕조를 팔라비 왕조로 바꿈에 따라 샤로 등극되어 팔라비 1세가 되었다.
리자 샤는 터키의 서구화를 모방하여 서구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이미 이란의 서구화는 카자르 왕조 때에도 있었다). 1935년에 와서는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지금의 이란으로 변경하였으며 1936년부터 궁정의 여성들부터 베일을 벗기 시작하여 서서히 이란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에 나치 독일이 이란을 침공하였으며 연합국에 의해 수복되었다. 역시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루마니아 등 전 추축국에 선전 포고하였다.
같은 해에 리자 샤가 죽고 의 황태자인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팔레비 2세)가 샤에 올랐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국제 연합의 창설 회원국이 되었으며 1951년 석유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였다. 한편, 1962년에는 백색 혁명이 일어나 종교 재단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등 강력한 개혁정책이 실시되었다.
이 개혁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이슬람 사회의 변질을 우려하던 여러 종교 지도자들의 반정부 운동을 부추기게 하였다(특히 호메이니의 경우이다). 팔라비 왕조는 1979년에 혁명으로 폐지되어 지금의 공화정으로 바뀌고 말았다.
[편집] 호메이니의 반정부 운동
1963년 6월 호메이니(Khomeini)의 주도로 반백색혁명이 발생하여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호메이니는 이라크의 바그다드로 망명하였으나 그의 정신적 지도력은 이란내 학생들과 농민들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이어졌으며 1970년대에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샤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높아져 갔다. 샤는 국가를 통제하기 위해 이러한 불만세력들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였고 이러한 강경대응은 더욱 반정부 운동을 강화시켰다.
[편집] 이란의 이슬람 혁명
1977년 11월 테헤란에서 시위가 일어났으며 1978년 2월 타브리즈(Tabriz)에서 폭동이 발생하는 등 심화된 반 팔레비 운동은 1979년의 이슬람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79년 3월 30-31일 국민투표에서 98%가 이슬람공화국 수립을 지지하였으며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호메이니가 4월 1일 이슬람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슬람 공화국 수립이후 이란은 국내외적으로 아주 복잡한 정치환경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
1980년 1월 25일 대통령 선거에서 제1대 대통령으로 바니샤르가 당선되었으며 4월 7일 공식적을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끊었으며(1979년까지는 친미 국가) 그 해 9월 22일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생하였다. 바니샤르 대통령은 1년 남짓 지난 후인 1981년 6월 호메이니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해임되고 7월 24일 알리리자이 대통령 취임하였으나 8월 30일 폭발사건으로 대통령이 사망함으로 대통령이 바뀌게 되었다.
10월 2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현재 호메이니를 이어서 국가원수인 최고 종교지도자 직위에 있는 케메네이가 당선되었다. 하메네이는 1985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며 호메이니와 협력관계를 잘 유지하였고 결국 1989년 6월 3일 호메이니가 사망한 다음 날 이란 최고 종교 지도자로 피선되었다.
호메이니 사후 이란 정치는 하메네이와 대통령 라프산자니의 2인 구도로 확정되었다. 라프산자니는 1989년 7월 28일 제5대 대통령 선거와 1993년 6월 12일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연이어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