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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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휘(避諱)는 고대 중국에서 황제나 자신의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관습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글자 뿐 아니라 음이 비슷한 글자를 모두 피하기도 했다. 이 관습은 한국, 일본등 주변의 한자문화권에 전파되었고 오랫동안 행해졌다. 휘(諱)는 원래 왕이나 제후의 이름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관습이 생겨난 것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고 여겼던 한자문화권의 인식 때문으로 자나 호와 같이 별명을 붙여 부르던 것이나 부모나 조상의 이름을 언급할 때 "홍길동"이라 하지 않고 "홍 길자 동자"라고 조심하여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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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피휘의 종류
- 국휘(國諱)는 황제나 왕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나라 때에는 진시황의 이름 '정(政)' 자를 피한다 하여 정월(正月)을 단월(端月)이라 고쳐 불렀다. 보통 칠대 위의 지배자까지 그 이름을 피했다.
- 가휘(家諱)는 집안 조상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 성인휘(聖人諱)는 성인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금나라 때에는 공자의 이름을 쓰는 것을 피했다.
나라 사이의 외교 문서나 집안 사이의 서신 등에서는 서로 피휘를 지켜 주었다. 왕의 이름에 쉬운 글자가 들어 있으면 나라 전체에 불편이 생기기 때문에 왕족의 이름은 잘 쓰지 않는 글자로 지었으며 주로 한 글자로 이름을 지었다. 삼국시대 위나라에서는 황제의 이름이 조황에서 조환으로 바뀌었다. ‘황’이라는 글자가 많은 사람들이 쓰는 글자라,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변경한 것이다.
1777년 청나라에서 왕석후(王錫侯)라는 학자가 건륭제의 이름을 책에 써서 본인을 포함해 수십 명의 관련된 사람이 처형당한 경우가 있다.
[편집] 피휘의 방법
피휘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었다.
- 대자(代字): 피할 글자를 소리가 같거나 비슷한 다른 글자로 대체해서 쓴다.
- 결자(缺字): 피할 글자를 쓰지 않고 공백으로 남겨 놓는다.
- 결획(缺劃): 피할 글자의 한 획, 특히 마지막 획을 긋지 않는다.
[편집] 한국의 경우
- 신라 시대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와 숭복사비문(崇福寺碑文)에서 육십갑자의 병진(丙辰)과 병오(丙午)를 각각 경진(景辰)과 경오(景午)라고 썼다. 이것은 당나라 고조(高祖)의 아버지 휘 ‘병(昞)’의 음을 피하기 위해 ‘경(景)’을 썼기 때문이다.
- 고려 시대 봉암사(鳳巖寺) 정진대사탑비문(靜眞大師塔碑文)에서 '문무양반(文武兩班)'을 '문호양반(文虎兩班)'이라고 썼다. 이것은 고려 혜종의 휘 ‘무(武)’를 피하기 위해 ‘호(虎)’를 썼기 때문이다. 중국 황제가 아닌 한국 왕의 휘를 피한 기록은 이것이 처음이다.
- 조선 시대 대구군의 한자 이름은 원래 ‘大丘’였으나 공자의 휘 ‘구(丘)’를 피하기 위해 ‘大邱’로 바뀌었다. 1750년 대구의 유생(儒生) 이양채(李亮采)가 공자의 휘가 ‘구(丘)’ 이므로 ‘大丘’를 ‘大邱’로 바꾸어달라고 상소했으나 영조의 윤허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정조때 부터 점차적으로 ‘大邱’라는 지명을 쓰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당 고조 이연(李淵)의 휘를 피하여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고 썼다.
- 조선 시대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청나라 고종(高宗)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홍례문(弘禮門)의 이름을 흥례문(興禮門)이라고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