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마르티노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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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노 5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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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마르티노 5세(라틴어: Martinus PP. V, 이탈리아어: Papa Martino V)는 제206대 로마 교황(재위: 1417년 11월 11일 - 1431년 2월 20일)이다. 세속명은 오도네 콜론나(이탈리아어: Oddone Colonna)이다.
[편집] 생애
1368년 이탈리아의 제나차노 출신으로 명문 집안인 콜론나 가문에서 유일하게 교황이 된 사람이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자 프랑스에서는 마르티노 5세에게 아비뇽에 거처할 궁전을 제공하였고 지기스문트는 독일에 마르티노 5세를 억류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마르티노 5세는 그런 제의를 물리치고 로마로 돌아갔다. 귀환 과정에서 로마에 바로 입성할 수는 없었고 1년 이상 피렌체에 머물러야만 했다. 마르티노 5세의 로마 귀환은 교황직과 교황령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마르티노 5세는 교황직의 위세를 회복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유럽의 모든 나라의 군주들과 연락을 취하고 대사관을 설치하였으며 특히 백년 전쟁을 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또한 후스파에 대항하고 교황청을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재정비하였으며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청 관리들의 일치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아라곤 왕국과의 긴 협상 끝에 많은 부분을 양도하고 1426년 프랑스와 맺은 제나차노의 콘코르다툼은 교황청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영국에서 제기한 성직록의 규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협상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마르티노 5세의 가장 큰 공로는 교황청령 안에서 교황이 다시 실권을 장악한 것이었다.
로마에서는 바티칸 궁전과 라테라노 대성당이 복구되었고 도로가 확장되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의 재일치를 위하여 상호 노력하였으나 정치적인 상황과 연계되어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았다. 1423년 파비아에서 열린 공의회는 참석률이 저조하여 시에나로 장소를 옮겨 속개하였으나 중도에 끝나고 말았다. 마르티노 5세는 교황이 되기 전에 피사 공의회와 공의회 우선주의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나 교황이 된 다음에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련한 계획과, 특히 교회의 개혁에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 교황의 권한에 반대되는 것은 현명한 방법으로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전 임 그레고리오 12세 |
제206대 교황 1417년 11월 11일 - 1431년 2월 20일 |
후 임 에우제니오 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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