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규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성규(金聖奎, 1891년 6월 7일 ~ 1919년 3월 4일)는 3·1 운동 때 만세 시위 군중에게 발포했다가 시위대에게 살해된 헌병보조원이다.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장이 열린 1919년 3월 4일, 사흘 전 서울에서 있었던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탑골 공원 시위의 후속 움직임으로 기독교 계열을 중심으로 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군중들은 약 3천여명이 학교와 교회에 집합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금제면 원장리에서 출발하여 강서군에 위치한 반석면 상사리의 사천시장 방면으로 시위 행진을 했다. 이는 반석면의 만세 시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헌병대의 총격으로 한 사람이 사망하고 주모자들이 체포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날은 원장에서만 예정대로 집회가 열렸고, 시위대는 헌병대의 만행을 규탄하고 구금된 이들에 대한 석방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여세를 몰아서 이동한 것이다.
이때 사천헌병주재소의 소장 사토(일본어: 佐藤實五郞)가 휘하의 조선인 헌병보조원들인 김성규와 강병일, 박요섭을 대동하고 행진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현경묵 등 시위 참가자 수십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 사건은 3·1 운동 최초의 사망자가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과 안주에서 발생한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유혈 사태였다.
김성규 등 헌병보조원 세 명은 사토와 함께 그 자리에서 분노한 시위대에게 살해되었으나, 그해 9월 11일 일본 정부로부터 시위 진압의 공적을 인정 받아 욱일장 8등, 훈8등 백색동엽장의 서훈을 받았다.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