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조선의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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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金弘集, 1842년 - 1896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다.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58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다녀와서, 서양근대의 기술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사유람단의 일본파견을 상주하게 하였다.
김홍집 일행은 1880년 7월 일본 기선 치토세(千歲)호 편으로 부산항을 통해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 체재 1개월 동안 이들은 일본정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두루 살폈다. 그런 한편 일본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빠져들어 친일파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수신사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일본 정부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바, 인천을 개항장으로 지정토록 하고, 일본공사의 서울 주재 등이 필요하다고 본국 정부에 품신하는 등 일본의 주구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1]
1882년 임오군란 후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의 부관으로서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맺는데 앞장섰으며,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후원을 업고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대신이 되었다. 청일 전쟁의 결과 일본이 득세하자 가력한 친일파가 입각한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이 때 홍범14조를 발표,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후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단발령 등 급격한 개혁을 실시하다가 전국에서 의병항쟁을 유발시켰으며,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 내각이 붕괴되는 동시에 김홍집은 매국친일당의 두목으로 몰려 광화문에서 군중에게 참살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총리대신으로서 정권을 도맡아 친일 내각을 조직하고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 圭介)의 지휘를 받으면서 조선 왕조를 강탈하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업무를 시작했다. 김홍집은 자신이 군국기무처의 총재를 겸임하면서 총재보좌 명목으로 일본 공사관 직원 4~5명을 끌어들여 이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등 친일매국행위에 앞장섰다.[2]
[편집] 각주
분류: 1842년 태어남 | 1896년 죽음 | 조선의 문신 | 조선 말기의 정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