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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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술희(朴述熙 또는 朴述希, ? ~ 945년)는 면천 박씨(沔川朴氏)의 시조로 고려 전기의 무신(武臣)이자, 개국공신으로 시호는 엄의(嚴毅)이다. 대승(大丞) 득의(得宜)의 아들이다.
[편집] 생애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개구리랑 뱀을 즐겨먹는 좀 야만적인 특이한 식성이 있었으나, 성격이 호탕하고 전장에서 용전분투하는 맹장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벽성의 호족 출신으로 18세 때 궁예의 호위병이 되고, 뒤에 태조의 휘하로 들어와 그를 섬겨 많은 공을 세워 두터운 신임을 얻어 대광(大匡)이 되었다. 왕무를 왕태자로 책봉하는 데 공이 컸으며, 943년 태조가 사망하기 직전에 태조로부터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으며,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혜종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호족 세력과 왕권, 그리고 왕규 사이에 얽힌 복잡한 권력 투쟁은 단순한 군인이었던 박술희에게는 버거운 것이었다. 혜종의 세력 기반은 미약하였고, 이복동생인 왕요와 왕소는 외할아버지의 세력인 충주 호족 세력과 왕식렴을 중심으로 한 서경 세력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외척인 왕규(王規)도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고 있었다.
태조가 아니면 유지되기 힘들었던 고려 초기의 불안한 정치 상황은 박술희에게는 불운이었다.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박술희는 왕요와 그를 지지하는 서경 세력에 의해 귀양을 가게 되어 죽음을 당했고, 그가 지키려 했던 혜종도 2년을 못넘기고 죽었다.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추증, 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