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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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뉴스(리투아니아어: Vilnius듣기 , 벨라루스어: Вільня 빌냐, 폴란드어: Wilno 빌노, 러시아어: Вильнюс 빌뉴스[*] (예전에는 Вильно 빌노), 독일어: Wilna 빌나[*], 문화어: 윌뉴스)는 리투아니아의 수도이다. 전간기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후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고, 이어 독립국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542,287명의 인구중 57.8%가 리투아니아인이고, 18.7%가 폴란드인, 13.9%가 러시아인, 4.0%가 벨라루스인이다.
[편집] 역사
원래는 발트인 정착촌이었으며 슬라브인들도 거주하였다. 적어도 11세기부터는 유대인들도 거주하기 시작했다.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323년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Gediminas)가 성채를 세우면서이다.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었다가 폴란드의 왕을 겸하게 된 브와디스와프 2세(리투아니아어: Jogaila 요가일라, 폴란드어: Jagiełło 야기에워)는 1387년 빌뉴스에 도시자치법에 따른 권리를 부여하였다. 당시 빌뉴스의 주민들은 리투아니아인들 외에도 루테니아인(근대의 벨라루스인), 폴란드인, 독일인, 유대인을 포함하였다.
1503년에서 1522년 사이 빌뉴스는 아홉 개의 성문과 세 개의 성탑을 갖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빌뉴스는 폴란드의 지그문트 2세(리투아니아어: Žygimantas Augustas, 폴란드어: Zygmunt II August)가 1544년 그곳으로 왕궁을 이전하면서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폴란드의 스테판 1세(리투아니아어: Steponas Batoras, 폴란드어: Stefan Batory)는 1579년 빌뉴스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대학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학문, 특히 과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빌뉴스 시는 급속도로 성장하며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폴란드인, 벨라루스인, 유대인, 러시아인, 독일인, 카라이파 유대인, 루테니아인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각각 시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655년 러시아 군이 빌뉴스를 함락시켜 약탈하고 불태웠다. 주민들은 학살되었다. 그후 빌뉴스의 성장은 주춤했으나 인구수는 다시 회복되어 19세기 초에는 동유럽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179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제3차 분할 이후 빌뉴스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어 구베르니야의 주도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1915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군이 점령하였다. 독일 군이 물러난 후에는 빌뉴스는 폴란드인 자위 부대, 볼셰비키 군, 폴란드 군, 다시 소비에트 연방 군의 손으로 넘어가며 그 지배자가 여러번 바뀌었다. 1920년 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 군에 패한 소련 군은 그해 7월 12일 평화 협정을 통해 새로이 독립국으로 재탄생한 리투아니아에 빌뉴스를 넘겨주었다. 10월 9일에는 루찬 젤리고프스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 군의 리투아니아·벨라루스 사단이 연출된 쿠데타를 통해 빌뉴스를 장악하였다. 빌뉴스 시와 주변 지역은 ‘중앙 리투아니아(폴란드어: Litwa Środkowa)’라는 독립된 국가로 선포되었다. 1922년 2월 20일에는 이 지역이 모두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카우나스의 리투아니아 정부는 폴란드가 불법적으로 빌뉴스를 점령하고 합병했다고 보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와의 관계는 1938년까지 단절된 상태로 계속되었다. 그동안 빌뉴스는 다시 빠르게 성장하였다. 당시 빌뉴스의 주민 대다수는 폴란드인과 유대인이었고 리투아니아인들은 소수였다(제1차 세계 대전 직후 3% 미만, 1930년대에는 1% 미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의 비밀 조항에 따라 소련은 1939년 9월 19일 빌뉴스를 장악하고 합병하였다. 1939년 10월 10일 소련의 최후통첩을 받은 리투아니아는 빌뉴스를 얻는 대신 소련이 리투아니아 각지에 군사 기지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곧 수도를 카우나스에서 빌뉴스로 이전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미처 끝내기도 전인 1940년 6월 소련은 리투아니아 전국을 점령하였다. 새로 설립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된 빌뉴스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졌다. 4만명에 달하는 수가 비밀경찰 엔카베데에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1941년 6월에는 빌뉴스가 독일 군에 함락되어 구시가에는 유대인 주민들을 위한 게토가 두 군데 세워졌다. 이 가운데 작은 게토는 같은 해 10월에 이미 ‘제거’된 상태였고 두번째 게토의 주민들은 이른바 악티오넨(독일어: aktionen)의 일환으로 수시로 학살되었다. 1943년 9월 1일 게토 반란이 실패로 끝난 후 두번째 게토도 파괴되었다. 265,000에 달했던 빌뉴스의 유대인 인구의 95% 정도가 독일 군과 리투아니아 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많은 수는 구시가에서 서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파네리아이(리투아니아어: Paneriai)에서 죽음을 맞았다.
1944년에는 폴란드 향토군과 소련군이 차례로 빌뉴스를 장악하였다. 빌뉴스는 다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로 소련에 합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소련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의 폴란드인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농촌의 리투아니아인들과 소련의 타 공화국에서 러시아인들이 도시에 이주하면서 전후 빌뉴스는 주민 구성, 문화, 전통이 완전히 바뀌었다.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 리투아니아 공화국을 회복시켰다. 소련은 1991년 1월 9일 군 병력을 투입하여 이에 대응했고 1월 13일에는 국립 라디오·텔레비전 건물과 빌뉴스 텔레비전 철탑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14명이 죽고 700명 이상 심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소련은 결국 1991년 8월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그 후 빌뉴스는 소련 시절의 흔적을 지우고 현대 유럽 도시로 탈바꿈하려 노력하며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옛 건물들은 수리되고 네리스 강 북쪽에는 새로운 시 중심가가 될 새 상업 지역이 발달되고 있다.
[편집] 바깥 고리
- ((리투아니아어/영어)) 공식홈페이지
- ((리투아니아어/영어)) 리투아니아 외국어 학교
- 빌뉴스 시
- 빌뉴스에 대하여
분류: 리투아니아의 도시 | 리투아니아의 세계유산 | 유럽 안의 수도